류서영의 명품이야기=질 샌더
1980년대 대학을 다닌 필자는 파워슈트(어깨가 과장된 패션)를 많이 입었고 디자이너로 일한 1990년대는 미니멀리즘 패션을 즐겼다. 그 당시 미니멀리즘으로 유명했던 패션 브랜드가 프라다와 질 샌더였다. 프라다의 포코노 나일론 원단에 어떠한 장식도 없이 삼각형의 프라다 로고만 들어간 토트백은 미니멀리즘의 정수였다. 질 샌더의 단아하고 심플한 실루엣은 절재된 미니멀리즘과 함께 조형미마저 느끼게 했다. 질 샌더의 저채도 컬러와 모노톤의 컬러에서는 미니멀리즘을 느끼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하이데마리 질리네 샌더(Heidemarie Jiline Sander)는 1943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국립섬유학교(National Engineering School of Textile)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대에서 2년간 교환학생으로 공부했고 돌아와 여성 매거진에서 패션에디터로 근무했다. 1967년 24세 되던 해 함부르크에서 작은 패션 사업을 시작했고 1968년 그녀의 이름을 따 ‘Jil Sander GmbH’를 설립했다. 1973년 함부르크에서 첫 여성 컬렉션을 발표했고 깔끔한 디자인은 새로운 세대의 비즈니스 여성을 위한 럭셔리 의류를 선보였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함에 매료되기 시작
1975년 프랑스 파리에서 쇼를 열었지만 대실패로 끝났고 1976년 여러 개의 품목을 겹겹이 레이어드한 ‘어니언룩(onion look)’을 발표했다. 질 샌더의 옷은 당시 파워슈트에 열광하던 여성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했다. 1978년 반전이 시작됐다. 질 샌더는 화장품 업체인 랭커스터(Lancaster)의 향수 모델로 직접 나서면서 대박이 났다. 1980년대 말부터 과장된 파워슈트에 질려가던 소비자들은 군더더기 없는 간결함이 특징인 질 샌더의 디자인에 매료되기 시작했고 199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1994년 첫 쇼룸이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문을 열었고 훗날 회사의 창의적인 본사가 되었다. 1997년 1월 첫 번째 남성 컬렉션이 밀라노에서 선보였다. 깔끔하고 편안한 컷과 매우 세련된 테일러링은 많은 소비자에게 호응을 얻었고 독창적인 디자인 접근 방식은 패션 세계를 풍요롭게 했다. 질 샌더의 디자인은 간결하면서 단순하며 심지어 솔기나 포켓까지도 눈에 띄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디자인됐다.
그녀는 인체에 어떤한 장식도 하지 않았다. 간결하면서도 순수한 형태를 추구하였으며 형(形)과 인체의 움직임을 최대한 활용했다.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일상적인 물건들을 단순하고 편리하게 설계하는 바우하우스(Bauhaus: 1919년 독일의 건축가 그로피우스가 설립한 예술종합학교)의 이념과 연결 지었다. 캐시미어 같은 고급 소재뿐만 아니라 네오프렌(neoprene: 듀퐁사가 개발한 합성고무)같은 신소재 사용에도 적극적이었다.
질 샌더는 1989년 독일 주식시장에 상장한 첫 번째 패션 기업이 되었고 1997년 남성복 컬렉션으로 사업을 넓혀갔다. 1999년 질 샌더는 프라다 그룹에 지분 75%를 매각했고 자신은 디자인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질 샌더의 CEO인 파트리치오 베르텔리와의 관계는 녹록지 않았다. 최고의 소재를 비롯해 품질에 대한 질 샌더의 고집으로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경영진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었다. 결국 2000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를 떠나는 비극을 맞이했다.
2003년 질 샌더는 ‘Jil Sander’로 돌아왔으나 1년 만에 다시 브랜드를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질 샌더가 떠난 후 라프 시몬스(Raf Simmons)가 왔고 그는 질 샌더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소비자는 어느덧 시몬스가 디자인하는 질 샌더에 익숙해졌다. 그러던 중 질 샌더의 두 번째 컴백 소식은 패션계에 화제가 됐다. 질 샌더는 2012년 69세의 나이로 패션계에 돌아왔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시몬스는 현대적이고 정돈된 여성의 이미지를 절제되고 우아한 분위기로 표현했다. 2013년 이후 질 샌더의 디자인은 오버사이즈 실루엣을 포멀하고 역동적인 쿠튀르 스타일로 전개했다.
비대칭 디자인, 노출 안 해도 관능성 내포
또 질 샌더는 인체를 구속하지 않은 실루엣과 간결하고 가벼운 소재를 사용함과 동시에 장식적 요소는 최대한 배제했다. 질 샌더의 비대칭 디자인은 인체를 많이 노출하지 않아도 관능성을 내포하였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하게 만들거나 여성의 곡선을 강조함으로써 관능적인 효과를 보여주었다. 2017년 4월부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루시와 루크 마이어가 브랜드의 수장을 맡았다. 2021년 3월 질 샌더는 마르니, 메종 마르지엘라, 디젤, 디스퀘어드, 빅터 앤 롤프 등 고급 패션 브랜드를 보유한 이탈리아의 국제적인 패션그룹 OTB(Only The Brave)에 팔렸다.
2009년 질 샌더는 유니클로와 협업해 2011년 가을·겨울 상품까지 ‘+J’라는 이름으로 상품을 출시하기도 했다. 패스트 패션(최신의 트렌드를 즉각적으로 반영하여 대량생산하는) 업체와 질 샌더의 협업은 패션계에 이슈로 떠올랐다. 자신의 브랜드도 버리고 나올 만큼 품질에 있어 타협할 줄 모르는 그녀가 유니클로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J’ 라인의 출시는 질 샌더 입장에서는 ‘미니멀리즘의 대중화’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질 샌더는 장인 정신과 장인의 노하우에 대한 최고의 감사와 함께 전통과 진보를 결합해 현대적이고 오래 지속되는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질 샌더는 유산을 보존하고 디자인을 통해 혁신을 발전시키는 데 전념한다. 이탈리아에 있는 OTB그룹은 장인학교(School of Craftsmanship)를 통해 견습 장인을 교육하며, 이 프로그램은 수공예와 디지털 기술을 결합해 차세대 인재를 육성하고 있다.
예술성과 성능을 융합한 희귀한 소재를 찾고 최고 품질의 천연 및 기술 섬유를 선택해 뛰어난 제품을 만든다. 가능한 한 유기농, 저영향 및 재활용 옵션을 공급하여 컬렉션 전체에서 점유율을 지속적으로 늘려가고 있으며 보다 책임감 있는 가죽 산업을 구축하는 데 전념하는 국제기구인 가죽워킹그룹(Leather Working Group)의 회원으로서 환경적으로 인증된 태닝 공장에서 가죽을 공급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질 샌더는 “나는 단순함 속에 호사스러움이 있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자료 참조: 질 샌더의 비대칭 패션디자인 연구(허성아, 한국기초조형학회), 질 샌더 홈페이지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