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급여 진료의 가격 결정권은 의사에게 있다.”
강성 의사 단체의 주장이 아니다. 최근 대법원이 내놓은 판결이다. 일부 비급여 과잉 진료 때문에 실손보험에서 대규모 적자를 보는 보험사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일각에선 과잉 진료를 일삼는 의사가 이 판결을 들어 책임을 회피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비급여 관리와 실손보험 개혁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와중에 대법원이 이런 판결을 내놓은 이유는 뭘까. 사연을 들여다보면 이렇다. 백내장 수술 기법 중 하나인 다초점 인공수정체 삽입술의 실손보험금 청구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나자, 금융당국은 2016년 이 수술을 실손보장 항목에서 제외했다.
이에 안과의사 A씨는 수술비를 160만원에서 60만원으로 낮추고, 검사비를 45만원에서 120만원으로 올렸다. 환자들은 수술비 대신 검사비를 실손보험금으로 수령했다. 결과적으로 A씨의 환자 수와 수입은 큰 변화 없이 유지됐다.
보험사는 A씨를 상대로 검사비를 부당하게 부풀렸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의 판단은 원고 패소였다. “법체계상 비급여는 사적 자치의 영역으로, 비급여 진료 가격에 대한 결정권은 의료기관이 갖는다”는 논리였다.
얼핏 보면 이번 판결은 비정상적 비급여 체계를 합리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의사와 환자 간 정보 비대칭은 엄연히 존재한다. 환자는 의사가 정해주는 대로 진료받고 진료비를 내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도 ‘사적 자치’를 과도하게 인정하면 의료시스템 붕괴는 더욱 가속화할 수 있다.
국민건강보험이 보장하는 ‘급여’ 항목은 정부의 통제가 가능하다. 이른바 필수의료 영역이 급여와 연결된다. 건강보험 범위 밖인 비급여 진료는 법원 판단대로 규제 수단이 없다. 많은 의사가 비급여가 많은 ‘피안성’(피부과·안과·성형외과)으로 몰려가는 이유다.
건강보험 재정에 매달린 정부는 무분별한 비급여를 모른 척하기도 했다. 그나마 내놓은 보완책이 비급여 가격을 의료기관이 공시하도록 한 것이었다. 진료비가 너무 비싼 병원에는 의료 소비자가 가지 않을 것이란 설명이다. 가격을 통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내놓은 대응책이겠지만, 소비자 뒤에 숨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역설적으로 이번 판결은 비급여 통제 장치가 없다는 점, 비급여 개혁이 절실하다는 점을 세상에 알렸다는 의미가 있다. 비정상적 비급여를 현재의 규제 시스템에선 용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정부는 뒤늦게나마 비급여 관리·실손보험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이번 기회에 ‘고무줄 진료비’ 논란을 끝내야 한다. 용두사미가 되면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