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수사당국에 비협조적인 자세를 고수하던 메신저 텔레그램이 최고경영자(CEO) 체포를 계기로 범죄 혐의 회원정보를 경찰에 제공하면서 국내 성 착취물 유포 범죄자가 검거됐다. 텔레그램의 정보 제공으로 국내에서 범죄자를 검거한 드문 사례다. 그동안 텔레그램을 음란물, 마약 거래의 온상으로 삼고 활개 쳐 온 다른 범죄자 수사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성 착취물 유포 방 운영 20대 검거제주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14일 성 착취물 소지·배포(아동·청소년 성보호 법률 위반) 및 허위 영상물 배포(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 20대 남성 A씨를 구속 송치했다고 밝혔다. A씨는 2021년 약 8개월 동안 ‘벗방채널’이라는 이름의 텔레그램 단체방을 운영하며 아동 성 착취물과 딥페이크 허위 영상물, 불법 촬영물 등 1000여 개를 유포한 혐의를 받는다.
경찰은 이 사건의 단서를 좀체 잡지 못해 한 차례 ‘수사 중지’ 결정을 내렸다. 텔레그램이 비협조적 태도로 일관해 관련 수사 정보를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년 텔레그램이 채널 운영자의 인터넷 프로토콜(IP) 주소와 가입에 사용된 전화번호 정보를 수사당국에 제공하면서 수사가 다시 급물살을 탔다. 경찰은 이를 토대로 12월 말 A씨를 체포할 수 있었다.
경찰청에 따르면 텔레그램은 작년 10월부터 딥페이크 음란물을 유포한 회원 정보를 한국 정부에 넘기기 시작했다. 자사 이용약관을 위반한 동시에 범죄 혐의가 있는 회원 정보다. 지난 7일 텔레그램이 공개한 ‘투명성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이용자 658명의 IP주소 또는 전화번호가 수사당국 요청으로 제공됐다.
파벨 두로프 텔레그램 창업자 겸 CEO가 작년 8월 프랑스 검찰에 체포되면서 텔레그램의 정책에 일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두로프 CEO는 미성년자 성 착취물 유포, 마약 밀매 공모, 자금세탁 공모, 텔레그램 내 불법 행위 및 조직범죄와 관련한 수사기관의 협조를 거부한 혐의를 받는다.
그동안 텔레그램은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를 대상으로만 수사 협조를 해왔으나, 작년 9월 서비스 약관과 개인정보 보호정책을 개정해 세계적으로 동일하게 협조하기 시작했다. 범죄자들 “나도 잡혀가나” ‘벌벌’A씨가 잡혔다는 사실이 국내 범죄자 사이에서 알음알음 알려지면서 텔레그램을 활용한 범죄에 가담한 이들은 긴장하고 있다. 이날 한 불법 촬영물 공유방에선 “실제 전화번호로 가입했으면 문제가 생기는 거냐” “휴대폰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강물에 던지면 되느냐” 등의 글이 올라왔다. 경찰 체포나 소환 시 대응법을 방 회원끼리 의논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일부 불법 채널 운영자는 추적을 회피하는 수법을 가다듬어 더 음지로 숨어들 조짐을 보인다. 공개 방을 앱 내부 결제 시스템인 암호화폐 톤코인 기반 회원 방으로 전환하거나, 방을 수시로 없애고 재개설하는 방식이다.
텔레그램이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으나 다른 글로벌 메신저보다 여전히 수사 정보 제공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텔레그램이 이용자의 IP 주소와 가입 당시 전화번호 외 다른 정보는 제공하지 않아서다. 페이스북이나 X(옛 트위터) 등 다른 해외 기반 SNS 기업은 한국 경찰 요청 시 이용자 로그 등 수사에 필요한 데이터를 폭넓게 제공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아직 정보 제공 범위가 좁지만 경찰도 VPN(가상 사설망)을 활용한 우회, 대포 유심 활용 등의 추적 회피에 대응해 수사기법을 고도화하고 있어 텔레그램 활용 범죄자 검거 폭이 늘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다빈 기자 davinc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