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은행들의 대출 총량이 초기화(리셋)됐다. 취급을 중단했던 대출 상품을 다시 팔고 한도도 늘릴 수 있다는 의미다. 주요 시중은행들은 ‘영업통’으로 꼽히는 은행장들을 전면배치하고 시장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빗장 풀린 만큼 연초 대출 문턱을 확 낮추며 영업에 힘줘야 하지만 안팎의 상황이 녹록지가 않다. 환율이 치솟으며 건전성 관리에 비상등이 켜졌고 기업대출 연체율도 높아지고 있다. 올 들어 더 세진 정부의 가계부채 관리 기조에 공격적인 영업은 물 건너갔다. 금융당국이 ‘월별·분기별 한도 관리’를 예고한 상태에서 타 은행 대비 금리를 드라마틱하게 낮췄다간 대출 쏠림으로 곤경에 처할 수도 있다.
◆“집 있어도 주담대 OK”…“우리는 NO”
은행권은 새해 들어 가계대출 문턱을 다소 낮추되 완화 수준은 제각각 속도를 보이고 있다.
국민은행과 우리은행은 주택 1채(수도권) 이상 소유하고 있으면 신규 주택담보대출(주담대)을 받을 수 없다. 신한은행은 비수도권 주택까지 유주택자의 대출을 제한한다. 농협은행은 수도권에서 2주택 이상 소유하면 주담대를 내주지 않는다. 반면 하나은행은 주담대 제한이 없다.
소유권 이전 등의 조건이 붙은 조건부 전세자금대출 취급도 은행마다 차이가 있다. 국민·신한·우리은행은 현행 대출 빗장을 유지한다. 갭투자(전세를 낀 주택 매입)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라고 은행들은 설명했다. 반면 농협은행은 조건부 전세대출을 취급하기 시작했다. 하나은행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전세대출을 허용한다.
주담대 만기나 생활안정자금대출 한도도 조금씩 다르다. 하나은행이 주담대 만기가 40년으로 가장 길다. 나머지 은행은 30년 만기 제한을 뒀다. 돈 빌리는 사람 입장에서 주담대 만기가 길수록 좋다. 대출의 만기가 늘어나면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계산식에서 연간 갚아야 하는 원리금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에 결국 대출 한도도 늘어난다.
국민은행과 하나은행은 생활안정자금 목적 주담대 한도를 없앤 반면, 신한·우리·농협은행은 1억원으로 묶였던 한도를 2억원으로 늘렸다.
◆주담대 금리 5%대 쑥
통상 금리 경쟁력으로 대출을 빠르게 늘리지만 은행권 대출금리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을 전망이다.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 기조에 시장 금리가 내려가고 있는 점을 반영하면 평균 3%대까지 금리를 낮출 수도 있지만 은행 간 눈치보기가 펼쳐지며 현재로선 요원해 보인다.
금융당국이 지난해 가계대출 증가 목표치를 넘긴 은행(신한·하나·우리)에 대해 페널티를 예고한 상황이어서 선제적인 대출금리 인하는 조심스러운 분위기다. 낮은 비용(이자)을 내는 은행으로 수요가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당국은 올해도 가계부채 증가율을 경상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이내로 관리하기로 했다. 특히 월별·분기별 대출 총량을 관리할 계획이다. 올해 명목 GDP 증가율은 약 3.6~4.0%로 예상된다.
미국 채권금리가 급등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기준금리 인하 속도조절을 시사하자 지난 연말 들어 미국 국채금리가 급등하기 시작했다. 1월 7일(현지 시간) 미국 10년물 국채금리는 지난해 5월 이후 약 8개월 만에 최고치인 4.7%에 근접했다. 이 여파로 주담대 고정금리 산정 근거가 되는 금융채 5년물이 출렁이고 있다. 지난해 12월 3일 2.914%에서 1월 3일 2.959%로 0.045%포인트 상승했다. 이자값 매길 때 보는 기준이 높아졌다는 얘기다.
5대 은행의 주담대 고정금리(5년)는 3.42~5.92% 수준이다(1월 6일). 한 달 전(지난해 12월 6일)과 비교해 3.35~5.75%에서 하단이 0.07%포인트, 상단이 0.17%포인트 올랐다. 지난해 8월 6일(2.94~5.69%)보다 하단 금리가 0.48%포인트, 상단이 0.23%포인트 상승했다.
◆고환율이 발목, 건전성 비상
연체율 증가에 기업대출도 ‘깜깜’
“어렵네요….” 말 그대로 은행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계대출 영업에 드라이브를 걸고 싶지만 당국의 눈초리가 걸린다. 돌파구로 기업대출을 강화하고 있지만 고환율 등 대외변수가 발목을 잡는다. 시장의 예상보다 환율이 더 가파르게 오르면 은행의 외화 위험가중자산이 증가해 자본 적정성 수치가 악화하게 되는데 여기에 대출을 늘릴 경우 부담이 더 커질 수 있다. 특히 저신용 중기대출은 위험가중치가 높게 산정돼 실행 시 리스크가 크다.
대출 연체 규모가 커지고 있다는 것도 부담이다. 5대 은행의 지난해 3분기 중소기업 대출 부문 신규 연체액이 3조원 넘게 증가했다. 역대 최대치다. 연체율도 상승하고 있다. 2024년 10월 연체율(0.70%)은 9월(0.65%) 대비 0.05%포인트 올랐다. 1년 전(0.44%)과 비교하면 0.15%포인트 상승했다.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넘보고 있어 악화할 가능성이 높다. 고환율로 기업 비용 부담이 가중되면 기업의 채무상환능력이 떨어진다.
은행권은 건전성 관리를 위해 중소기업 여신을 줄이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5대 은행의 지난해 12월 대출 잔액(662조2290억원)은 전월보다 3조7318억원 감소했다. 2023년 1월(926억원 감소) 이후 약 2년 만의 순감소다. 통상 연말에는 기업들이 재무제표 관리를 위해 대출 상환을 늘리거나 은행들이 신규 대출을 연초로 미루는 등의 관행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감소폭이 확대됐다.
은행권 관계자는 “우량업체 위주로 기업대출 외형을 넓힐 수밖에 없다”며 “가계대출은 정부의 스탠스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돋보기
경쟁 치열한 큰 시장도 눈치전
새해 들어 은행 간 대출 경쟁이 치열해진 곳이 있다. 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으로 불리는 서울 강동구 올림픽파크포레온(둔촌주공 재건축)이다. 주요 시중은행들이 잔금대출(집단대출) 한도를 추가 배정하며 기존 9500억원에서 1조5500억원으로 늘어났다. 대단지 잔금대출은 리스크가 적고 수익이 좋아 은행 입장에선 놓칠 수 없다. 1만2000여 세대 규모로 들어서는 올림픽파크포레온은 총 3조원의 대출금이 걸린 황금어장이다.
가장 적극적인 곳은 KB국민은행이다. 올림픽파크포레온에 배정한 잔금대출 한도를 3000억원 증액했다. 기존 3000억원에서 총 6000억원 규모로 키운 것이다. 시중은행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다음은 NH농협은행이다. 2000억원을 추가 배정했다. 기존 한도를 더하면 총 4000억원 규모다. 우리은행은 1000억원을 증액해 총 1500억원을 배정했다.
하지만 은행권의 대출 규제가 전부 풀린 것은 아니다. 신한은행과 하나은행은 한도 추가 배정 부여를 아직 논의 중이다. 국민은행과 우리은행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전세자금대출을 막아놨다. 이 아파트는 실거주 의무가 3년 유예되면서 수분양자가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받아 잔금을 치를 수 있는 상황이다.
금리 경쟁도 뜨뜨미지근하다. 이자값을 확 낮춘 은행이 없다. 5대 은행권 모두 가산금리를 1.3%포인트로 제시했다. 국민은행과 신한은행이 당초보다 0.2%포인트 내렸고 하나·농협은행은 0.1%포인트 인하했다. 국민은행의 경우 올림픽파크포레온 잔금대출 금리는 금융채 5년물 금리에 가산금리 1.3%포인트가 더해진 연 4.29∼4.79%다.
은행권 관계자는 “대출 총량은 정해져 있어 올림픽파크포레온 대출이 늘어나면 다른 실수요자들은 상대적으로 대출 받기가 어려워진다. 연초부터 특정 단지에만 대출을 쏟아낼 경우 형평성 논란이 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