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과 창원, 포항, 여수, 거제까지 한국의 고속 성장을 이끈 산업도시에서 청년들이 떠나고 있다. 자동차와 선박, 철강, 석유화학 등 한국 핵심 산업이 밀집한 기업 도시지만 지난 10년간 이들 도시를 떠난 청년만 20만 명에 육박한다. 단순 생산직은 기계나 외국인 근로자로 대체된 가운데 연구개발(R&D) 등 고급 연구·엔지니어링 부서의 상당수가 수도권으로 올라가 청년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8일 한국경제신문이 통계청의 국내 인구이동 통계를 분석한 결과 2014년 초부터 올해 11월 말까지 약 10년간 울산, 창원, 포항, 여수, 거제 등 5대 산업도시에서 순유출된 인구는 24만4683명이었다. 작년 말 기준 이들 5개 도시 전체 인구(307만 명)의 7.5%에 해당한다. 여수(26만8000명)나 거제(23만3000명) 규모의 산업도시 한 곳이 통째로 없어진 셈이다.
연령별로는 20~39세 청년 생산인구가 14만1410명으로 유출 인구의 58%를 차지했다. 19세 이하 청소년을 합치면 19만4210명으로 비중이 80%에 달한다. 전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꼽히는 산업도시에서 청년들이 떠나는 이른바 ‘엑소더스(exodus·탈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1997년 광역시로 승격한 울산은 산업도시 위기의 상징이 됐다. 출범 당시 101만 명이던 울산 인구는 2017년 117만 명으로 정점을 찍었지만 청년층의 이탈로 작년 말 109만 명으로 줄었다.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이 가장 높은 지방자치단체지만 2023년 기준 청년실업률(15~29세)은 9.7%로 전국 광역지자체 중 가장 높다.
청년이 산업도시를 떠난 것은 그들에게 맞는 일자리가 없어서다. 기업은 많지만 고용은 제한적이다. R&D 경쟁이 치열해지며 고급 연구·엔지니어 부서 상당수가 수도권으로 올라갔다. 생산직은 기계로 대체되거나 외국인 근로자로 채워지고 있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산업도시의 청년 이탈과 고령화에 제대로 대비하지 않으면 한국 경제를 지탱해온 제조업 경쟁력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50대 이상 비율 27%→38%…숙련 근로자 10년 뒤 대부분 은퇴
산업지대가 최대 인구감소 지역…제조업 가치사슬 경쟁력 하락세통계청이 지난해 5월 발표한 ‘장래인구추계 시·도편’은 의외의 수치를 제시해 주목을 끌었다. 향후 30년간 인구 변화를 예측한 이 보고서에서 통계청은 울산 인구가 2022년 111만 명에서 2052년 83만 명으로 25.7% 감소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부산(-25.8%)에 이어 17개 광역지자체 중 두 번째로 높은 감소율로 전국 평균(-10.5%)의 두 배가 넘는 속도로 인구가 줄 것으로 예측한 것이다. 울산을 비롯해 포항, 거제, 창원 등 산업도시가 밀집한 영남권의 인구 감소율도 22.5%에 달했다. 세계 최고의 제조업 밸류체인을 보유한 영남권 산업지대가 한국 최대 인구 감소 지역이란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세계 1위 조선업 밸류체인 중국에 역전
8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23년 말 기준 울산 제조업 근로자 18만 명 가운데 60세 이상이 2만1000명, 50~59세는 5만6000명으로 50대 이상이 전체의 43%를 차지했다. 전국 평균(38%)을 웃돌고 광역지자체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다. 10년 전인 2013년 이 비율은 울산이 29%, 전국 평균이 27%였다. 불과 10년 만에 제조업 현장의 급속한 고령화가 진행된 것이다. 10년 후면 현재 제조업을 지탱하는 50대 이상 고숙련 근로자가 대부분 은퇴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산업계에선 산업도시 인구 감소와 제조 현장 고령화가 한국이 자랑해온 제조업 밸류체인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조선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1~3분기 HD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한화오션 등 국내 조선사들이 신규 고용한 인력 1만4359명 중 86%가 외국인이었다. 이미 3년 치 일감을 채운 상황에서 대규모 인력 채용에 나섰지만 정부 주선으로 확보한 외국인 근로자 외에 국내 인력은 거의 구하지 못한 셈이다.
현재는 상당 부분 정상화됐지만 작년 상반기까지 조선업계 내부적으로 추정한 인도지연율은 최고 15%에 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선업은 기본 부품인 볼트부터 축구장 3개 크기의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까지 사실상 모든 밸류체인을 망라한 제조업 인프라를 바탕으로 ‘납기 준수’를 최대 강점으로 내세워왔다. 하지만 숙련도가 떨어지고 의사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외국인 근로자가 대거 유입되면서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일자리-교육-연구’ 가능한 공간을”‘제조강국’ 한국의 경쟁력이 정점을 찍고 하락세를 타고 있다는 위기 신호는 대부분 업종에서 감지된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2021년 기준 한국의 자동차산업 가치사슬 경쟁력은 84.0점으로 독일(93.2점), 미국(92.1점), 일본(86.3점)에 이어 4위였다. 1년 전과 같은 순위를 유지했다. 5위는 75.5점의 중국이었다.
하지만 중소 협력사의 역량이 좌우하는 조달 분야에선 중국에 따라잡혀 5위로 내려앉았다. 자동차 시장 규모를 나타내는 수요 분야에서 이미 한국을 추월한 중국은 일본마저 따라잡고 3위로 올라섰다.
산업연구원의 분석은 전기차 대전환이라는 최근 추세를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 지난해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전기차 생산국으로 올라선 만큼 종합 경쟁력에서도 중국에 4위 자리를 내주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분석이 나온다.
세계 1위를 유지하던 조선업 경쟁력은 2023년 중국에 처음 역전당했다. 중국은 90.6점으로 88.9점의 한국을 제쳤다. 유조선 분야가 중국에 처음 1위 자리를 내줬다. 한국이 1위를 지키는 고부가가치 선박의 격차도 급격히 좁혀지고 있다. 컨테이너선은 중국과 점수 차가 2021년 3.7점에서 2023년 0.3점까지 좁혀졌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제조업이 고령화를 극복하고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제조업 현장을 혁신하는 동시에 교육부터 일자리까지 지역 내에서 이뤄지는 경제 구조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송우경 산업연구원 지역균형발전연구센터 소장은 “옛 산업도시에 새로운 산업의 싹이 틀 수 있도록 규제를 풀고 특구로 지정해 기존 제조업과 첨단산업이 어우러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황정환/정영효/이슬기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