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굴지의 대기업 A사는 이달 초 확정한 내년 경영계획을 전면 수정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무역장벽을 내놓고 있는 데다 예상치 못한 탄핵정국까지 겹치면서 시장의 ‘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A사는 내년 경영 환경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최악이 될 것으로 보고 설비 투자는 물론 채용도 줄이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국내 대형 유통기업 B사는 내년 인수합병(M&A)과 신사업 계획을 보류하기로 했다. 경기 침체와 원·달러 환율 상승 여파로 내수가 급격히 위축되고 있어서다. 재계에선 대외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노사 갈등 심화, 중국의 추격 가속화, 각종 규제 심화 등 악재가 더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내년 한국 경제가 ‘퍼펙트스톰’(복합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최대 낙폭
26일 나온 각종 통계만 봐도 알 수 있다. 하나같이 ‘위기’를 가리키고 있어서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이날 발표한 업종별 기업경기실사지수(BSI)를 보면 전자·통신(105.3)과 의약품(100)을 제외한 나머지 8개 제조업종의 내년 1월 경기가 나빠질 것으로 전망됐다. 중국의 ‘침공’과 트럼프 2기 관세 폭탄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자동차(85.3) 화학(85.2) 금속(82.8) 업종의 상황이 가장 심각한 것으로 조사됐다. BSI가 기준치인 100보다 낮으면 전달보다 경기가 나빠질 것으로 본다는 의미다.
내수 기업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이날 내년 소매유통시장이 올해 대비 0.4% 성장하는 데 그칠 것이란 자료를 냈다. 코로나19가 덮친 2020년(-1.2%) 후 가장 낮은 수치다.
우리 기업을 둘러싼 경영 여건을 하나씩 살펴보면 내년 경기를 어둡게 볼 수밖에 없다고 기업인들은 호소한다. 탄핵정국과 트럼프 2기 출범에 따른 불확실성 증대에 원·달러 환율 급등, 전기료 인상, 중국산 저가 공세 심화 등이 한꺼번에 몰아치고 있어서다. 석유화학업계와 철강업계는 이미 감산과 구조조정에 나섰다. 미국에 공장을 짓기 위해 수조원을 쏟아부은 배터리업계는 전기자동차 보조금 폐지 가능성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상호 한경협 경제산업본부장은 “내수시장이 갈수록 악화하는 상황에서 수출 환경마저 나빠진 셈”이라고 설명했다. ○“과거와 차원이 다른 위기”업계에선 지금 우리 기업을 둘러싼 경영 환경이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더 악화했다고 입을 모은다. 급격한 인건비 상승과 주 52시간 근로제에 따른 연구개발(R&D) 경쟁력 약화 등으로 기초체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중국의 추격과 미국의 보호무역 강화 등 대외 리스크가 동시다발로 터져서다.
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는 “코로나19 이전과 비교해 평균 연봉이 50%가량 올랐다”며 “중국이 반도체, 전기차, 가전 등 한국 먹거리를 하나둘 빼앗고 있지만 추격을 따돌릴 만한 뾰족한 대책이 없다”고 토로했다.
원화 가치 하락이 경기 회복을 이끈 과거의 공식도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플레이어로 성장하면서 해외에서 생산해 현지 통화로 판매하는 게 일반화됐기 때문이다. 환율이 오르면 달러로 사들이는 부품 구입비만 늘어날 뿐 판매할 때는 별다른 도움이 안 된다는 얘기다.
내년 노사 갈등이 심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것도 기업의 주름살을 늘리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150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9.3%가 내년 노사관계가 올해보다 불안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정치권이 추진하는 상법 개정도 리스크 요인이다. 산업계는 기업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이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되면 사법 리스크가 커져 기업 경영이 위축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박의명 기자 uimy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