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롤모델 중 한 명은 버니 샌더스 미국 상원의원이다. 샌더스는 미국 좌파 정치인의 대명사로, 자칭 민주사회주의자다. 이 대표는 지난 대선 때도 샌더스에 비유되는 것을 좋아했다. 요즘엔 그 인물이 샌더스와는 도저히 양립할 것 같지 않은 부류로 바뀌었다. 도널드 트럼프다. 이 대표는 외신 인터뷰에서 자신이 ‘한국의 트럼프’로 불린다고 했다.
트럼프와 이 대표는 외견상 닮은 구석이 많다. 정치 언어에서부터 극렬 팬덤, SNS 선전술, 그리고 극도의 자기중심적 성품까지. 이 대표는 트럼프가 사법 리스크를 뚫고 대권을 잡은 데 무엇보다 고무됐을 것이다. 두 사람의 사법 리스크는 결이 다르다. 트럼프의 세 가지 사건은 민간인 신분 때 일(포르노 배우 입막음 사건)과 2020 대선 관련 사건들이다. 반면 이 대표의 8개 사건은 모두 공직자로서 기망, 독직, 유용 등 불법을 저지른 혐의다. 어쨌든 사법 리스크를 돌파한 트럼프는 그에게 희망이다.
정치 콘텐츠에서도 이 대표는 한국의 트럼프임을 강조하고 싶을 거다. 그가 ‘먹사니즘’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것처럼 트럼프 역시 미국인의 먹고사는 문제로 유권자들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한 꺼풀만 벗겨보면 먹사니즘과 트럼프노믹스 2.0은 완벽한 대척점에 서 있다.
트럼프노믹스 2.0의 요체는 파격적 감세와 규제 철폐다. 트럼프는 1기 때 법인세율을 종전 최고 35%에서 21% 단일세율로 낮췄다. 미국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유로존을 능가하고 최저 수준의 빈곤율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게 바로 기업들을 신명 나게 뛰게 한 감세 효과였다. 트럼프 2기 때는 법인세를 20%로 더 낮추는 것은 물론 미국 내 사업장에는 15%까지 내리겠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경제 활력 정책들을 취임 100일 이내에 모두 끝내겠다고 하니 미국 산업계는 벌써 들썩이고 있다.
이 대표는 감세 얘기만 나오면 극도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그는 법인세 인하를 부자 감세를 넘어 ‘초부자 감세’라고 비난한다. 그가 먹사니즘을 주창한 올 7월 민주당 대표 출마 선언문에서 성장 담론이라고 제시한 게 재생에너지다. 재생에너지가 여러 장점이 있다고 해서 이를 성장동력으로까지 삼겠다는 발상은 수긍하기 어렵다. 네이처지에 실린 세계 주요 42개국의 태양광·풍력 안정성 연구 결과를 보면, 한국의 입지 조건은 예상대로 꼴찌다. 1200조~1800조원의 천문학적 에너지저장장치(ESS) 투자 효율성도 심히 의문이다.
트럼프노믹스의 또 하나의 핵심은 규제 철폐다. 미국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두 기업인 일론 머스크와 비벡 라마스와미는 트럼프 취임 첫날부터 당장 폐기할 규제 리스트 작성에 골몰하고 있다. 대부분 노동 및 환경 관련 규제다. 이 대표가 이끄는 한국의 민주당에서 이런 규제 철폐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뒷배가 민주노총, 환경 시민단체들인데 말이다. 트럼프의 규제 관련 공약 중에는 근로 의욕 고취를 위해 초과근무수당에 붙는 세금을 면제해주는 내용도 있다. 민주당은 초과근무라는 말만 나와도 펄쩍 뛰는 사람들이다. 세계 모든 첨단 기업이 날밤을 새워가며 연구개발(R&D)을 한다고 아무리 절규해봐야, 반도체 주 52시간제 예외에는 꿈쩍도 않는다. 대신 주 4.5일제와 주 4일제를 얘기한다.
이재명 먹사니즘의 궁극적 지향점은 기본사회다. 소득, 주거, 금융, 의료, 교육 등 국민의 ‘기본적’ 삶을 ‘국가’가 보장해주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경제학은 세금, 규제 등 기업 활동의 장애물을 최대한 덜어줄 테니 일자리 창출과 더 많은 세수로 보답해줄 것을 기대한다. 이재명 경제학은 기업들에 악착같이 세금을 걷어 유권자들에게 나눠주면서 더 놀라고 유혹한다. 기본 시리즈를 충족하려면 더 많은 세금이 필요할 텐데, 현시점에선 ‘국토보유세’와 같은 발톱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이 대표는 ‘한국의 트럼프’가 아니라 부유세와 무상의료·무상교육을 내건 샌더스에 훨씬 가깝다. 트럼프와 샌더스 간 간극은 유연함으로 치부할 수준이 아니다. 정체성 의심을 받는 사람들이 늘 둘러대는 핑계가 실용이다. 미국 대사 앞에서 얘기와 중국 대사 앞에서 얘기가 180도 다른 한국 정치인이 어떻게 비칠까. 나쁜 사람보다 더 위험한 사람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