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석유화학업계에 본격적인 불황이 찾아온 건 2022년이다. 2010년대 중반부터 2021년까지 석화산업은 ‘슈퍼 호황’을 누렸다. 특히 2021년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자기기와 플라스틱, 가구 구입이 늘면서 석화제품 수요가 급증했다. 2022년부터 상황이 급변했다. 중국·중동 업체의 기술력 확대 및 설비 증설로 국내 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추락하면서 실적이 악화했다. 2021년 13.4%였던 국내 석화업계의 영업이익률은 2022년 2.4%, 작년 0.6%로 급락한 데 이어 올해는 적자 전환이 확실시된다. 정부와 업계가 모처럼 합심해 자발적인 구조조정에 나선 배경이다.자발적 사업 재편 신속 추진정부는 중국 기업의 파상 공세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내 석유화학업체의 사업 구조를 에틸렌 등 기존 기초제품 중심에서 코폴리에스테르, 고부가합성수지(ABS) 등 스페셜티(고부가가치) 제품 위주로 바꾸도록 유도하겠다는 계획이다. LG화학, 롯데케미칼, 금호석유화학, 한화솔루션 등 국내 4대 석유화학업체의 연결 기준 영업이익은 작년 4분기 -390억원에서 올 3분기 -4170억원으로 적자 규모가 11배로 증가했다. 에틸렌을 주력 생산하는 롯데케미칼이 3분기에만 4140억원의 영업손실을 낸 영향이 컸다.
정부는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기업활력법)을 활용해 인수합병(M&A)뿐 아니라 합작법인 설립, 설비 폐쇄, 사업 매각 등을 유도하겠다는 계획이다. 기업활력법은 사업 재편을 신속하게 할 수 있도록 관련 절차와 규제를 한 번에 풀어주는 ‘원샷법’이다. 기업활력법에 명시된 인센티브도 확대한다. 현행법상 사업 재편을 통해 지주회사 지분 100%를 매입해야 하는 기간을 3년 유예해주고 있는데, 이를 5년으로 늘려 사업하면서 번 돈으로 지분을 매입할 수 있게 시간을 벌어주겠다는 계획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기업결합심사를 신속하게 진행하고, 설비 폐쇄 등에 대한 사전심사 기간도 현행 30일에서 15일로 줄여 간소화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석화 원료인 나프타와 나프타 제조용 원유의 무관세 기간을 내년 말까지 1년 더 연장하고, 공업원료용 액화천연가스(LNG) 석유 수입 부과금을 환급해줄 예정이다.빅딜·합작법인 설립 이어지나석화업계는 탄핵 정국 속에서도 정부가 이번 방안을 내놓은 것에 대해 안도하고 있다. 요청했던 제도 개선 방안도 대부분 반영됐다는 입장이다.
문제는 정부와 업계 의도대로 사업 재편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지다. 정부는 석화산업의 근본적인 경쟁력 확보를 위해선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범용설비 축소 등에 나서야 한다고 보고 있다. 업체들이 ‘나 홀로 생존’을 위해 사업을 재편하는 대신 범용제품 물량을 쏟아내면서 이른바 ‘치킨게임’을 벌이면 공멸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석화업계의 대표적 수익성 지표인 ‘에틸렌 스프레드’(에틸렌에서 원료인 나프타 가격을 뺀 금액)가 두 달 새 두 배 이상 오른 것도 이런 우려를 더한다. 업계 관계자는 “한 업체의 감산이 다른 업체엔 이득이 되는 전형적인 딜레마”라며 “실질적인 M&A가 이뤄질 수 있도록 좀 더 강력한 유인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다만 업계는 이번 대책에 따라 대형 업체 간 ‘빅딜’뿐 아니라 합작법인(JV) 설립을 비롯한 합종연횡 등 다양한 시나리오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는 LG화학과 롯데케미칼 간 ‘빅딜’도 재부상할 수 있다. 나프타분해시설(NCC) 통합이나 JV 설립 등의 시나리오가 거론된다.
특히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의 합작법인인 여천NCC 구조조정 여부가 석화업계 구조조정의 분수령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여천NCC는 국내 에틸렌 생산 3위 업체다. 2021년까지 연평균 2000억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냈지만 불황기에 접어들면서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안정적인 에틸렌 사업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한화와 DL 측은 당장 여천NCC 매각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경민/성상훈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