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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두 기둥이 흔들리고 있다. 최근 역내 1·2위 경제 대국인 독일과 프랑스 내각이 연이어 불신임 판정을 받으며 정치적 공백에 빠졌다. 프랑스는 다섯 달 만에 총리를 두 번 바꿨고, 독일은 내년 2월 총선을 치른다. 이 혼란의 중심에는 지난 4월 시행된 유럽연합(EU) 재정준칙과 이를 이행하기 위한 긴축 예산이, 그 이면에는 저성장이라는 유럽의 예견된 미래를 향한 고민이 있다.
긴축 예산 반발에 獨·佛 내각 붕괴22일 외신에 따르면 사회민주당(SPD)과 자유민주당(FDP), 녹색당으로 구성된 독일 신호등 연정이 붕괴한 원인은 ‘부채 제동’ 제도에 관한 견해차였다. 독일 헌법은 연간 신규 정부 부채를 국내총생산(GDP)의 0.35%로 제한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독일에서는 이 부채 제동을 폐지하거나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작년 독일 경제가 -0.3% 성장한 데 이어 올해까지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할 가능성이 커지면서다.
올라프 숄츠 총리가 이끄는 SPD와 녹색당은 부채 제동 폐지 또는 개정을, FDP는 유지를 주장했다. SPD와 녹색당은 위기에 빠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전기차 보조금을 되살리고 소득세를 감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재정 매파인 FDP 소속 크리스티안 린트너 재무장관은 재정 개혁으로 예산을 조달하고 부채 제동을 지켜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숄츠 총리가 린트너 재무장관을 해임해 연정이 붕괴했다.
지난 4일 미셸 바르니에 프랑스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무너진 원인도 예산이었다. 바르니에 총리는 600억유로(약 90조원)를 절감하는 긴축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올해 GDP의 6.1%로 예상되는 재정적자율을 내년 5%로 낮춘다는 계획이었다. 바르니에 내각은 전기요금을 인상하고 연금 수급액을 낮추겠다고 제안했으나,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국민연합 등 야권이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해 바르니에 총리는 임명 석 달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적자 축소 압박하는 재정준칙독일 FDP와 프랑스 바르니에 내각이 정치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긴축 예산을 고수한 것은 EU 재정준칙 압박 때문이다. EU는 지난해 말 재정준칙에 합의해 올 4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재정적자와 부채비율이 각각 GDP의 3%, 60%를 초과한 EU 회원국은 부채 감축 의무를 진다.
재정적자율이 3%를 넘으면 회원국은 초과 적자 시정 절차를 밟는다. GDP 대비 부채비율이 60~90%인 회원국은 매년 부채비율을 0.5%포인트, 90% 이상인 회원국은 1%포인트 감축해야 한다. 이를 준수하지 않으면 매년 GDP의 0.05%포인트씩 벌금이 누적돼 최대 0.25%의 벌금을 매년 내야 한다. 바르니에 내각이 2029년까지 재정적자율을 GDP의 3%로 줄이겠다고 공약한 이유다.
독일과 프랑스는 2년간의 재정준칙 합의 과정에서 가장 크게 대립했다. 정부 부채비율이 올해 62.7%로 EU 내에서 가장 낮은 독일은 “과거의 번영이 오늘과 내일 사회보장의 기초가 될 수 없다”며 엄격한 재정준칙을 주장했다. 반면 부채비율이 높은 프랑스는 “개별 회원국의 주권을 무시하는 정책은 유럽의 생산과 성장에 타격을 줄 것”이라고 맞섰다. 그러나 매파적 태도를 유지한 독일은 급격한 경기 둔화를 극복하기 위해 재정을 확대해야 하고, 비둘기파인 프랑스 정부는 긴축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맞닥뜨렸다. 부채 이자 갚기도 버거워질 판올해 EU의 총 정부부채는 약 13조1000억유로(약 2경원), 회원국 평균 정부부채 비율은 88.1%다. 이 같은 부채 비율은 일본(251.2%), 미국(121%)보다 낮고 기축통화국이 아닌 캐나다(106.1%)나 중국(90.1%) 등에 비해서도 높은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EU가 부채를 줄이려고 하는 것은 약해진 경제 체질로 인해 부채 이자를 감당하기도 버거워질 전망이어서다.
유로스탯에 따르면 EU 인구는 2026년 4억5300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2100년 4억2000만 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노인 인구 비중은 20%로 전 대륙 중 가장 높다. 획기적인 생산성 향상의 기회마저 미국에 인공지능(AI) 양자컴퓨팅 등 기술 주도권을 빼앗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내년 경제성장률을 0.9%, 독일은 0.7%로 예상했다.
독일 SPD와 프랑스 국민연합 등은 단기 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재정지출 확대를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이로 인한 부채 이자의 증가다.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 물가가 올라 실질 부채 부담이 줄어들고, GDP 대비 부채 비중도 감소할 수 있다. 현재 유럽의 상황은 그 반대다. 경제성장이 둔화하면서 부채 이자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다시 성장을 압박하는 악순환의 초입에 들어선 것이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지난달 금융안정성 검토 보고서를 통해 2034년 프랑스의 GDP 대비 순이자지출액 비율이 현재의 약 두 배인 6%로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ECB는 “부채 확대와 높은 재정적자, 그리고 약한 장기 성장잠재력으로 (EU 회원국) 국가부채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시장의 우려를 다시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다”며 유로존 위기가 재연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인엽 기자 insi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