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실리콘밸리도 소공인서 출발했다

입력 2024-12-22 17:32
수정 2024-12-23 00:36
지난 10월 우즈베키스탄에서 지역경제 활성화를 주제로 열린 국제회의에 김영흥 전국소공인연합회장(삼영이엔지 대표)이 강연자로 나섰다. 우즈베키스탄 유엔사무소와 미국국제개발처(USAID)의 초청으로 ‘한국의 경제 발전과 소공인의 역할’을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6월에는 주한 과테말라 대사가 경기 화성에 있는 소공인 집적지구 공동기반시설을 찾았다. 레이저가공기, CNC 선반, 수직밀링머신 등 제품 개발에 필요한 고가 장비를 대여하고 기술 교육을 지원하는 곳이다.

한국에서는 무명(無名)의 소공인이 제조업 발전이 더딘 국가에선 선망의 대상이다. 상시 근로자 10인 미만의 소공인의 존재감은 실로 만만치 않다. 63만여 개 국내 제조업체 중 88.9%를 소공인이 차지한다. 금속가공, 의류 제조 등 다양한 영역에서 시제품 제작부터 부품 가공에 이르기까지 소공인이 관여하지 않는 분야는 거의 없다. 소공인을 ‘제조업의 실핏줄’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제조업의 모세혈관소공인의 경쟁력은 무엇보다 숙련된 기술력에 있다. 서울 문래동과 부산 사상구 등의 소공인 집적지엔 ‘꼬마’(경력 3년 차 미만)를 거쳐 ‘중함빠’(10년 차), ‘함빠’(20년 차 이상)로 이어지는 장인이 즐비하다. 2만 개가 넘는 자동차 부품도 소공인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조달하기 어렵다. 설계 도면에서 미처 고려하지 못한 한계를 소공인이 암묵지를 발휘해 제품화에 성공하기도 한다.

최첨단 반도체 공정의 끝단에도 소공인이 있다. 경기 파주의 공간정밀은 반도체 제작 공정의 일곱 번째 단계인 테스트 공정에 필요한 부품의 절삭 가공 작업을 맡고 있다. 이 회사 김대구 대표가 40여 년 전 실업계 고교 시절부터 터득한 다듬질의 원리가 기술력의 원천이다. 경기 화성의 태영정밀은 잠수함에 장착되는 어뢰 부품을 만든다.

소공인의 역할에 비해 관심과 지원은 열악하다. 소상인에 묻혀 소공인이라는 단어조차 생경한 것이 현실이다. 전국의 17개 광역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소공인 지원 조례가 제정된 곳은 서울시와 경기도, 부산시 등 10곳에 그친다. 226개 기초지자체 중에서는 단 12곳에 머문다. 조례가 없으면 지원 예산을 편성하는 데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탈(脫)원전 정책보다 더 큰 충격을 던진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의 후폭풍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개발 자금 공급이 끊기면서 소공인의 시제품 제작 환경까지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정부, 소공인 지원 미흡소공인이 제조업의 실핏줄 역할에만 그치는 건 아니다. 성장 속도는 더딘 편이지만 축적된 기술력을 발판으로 스타트업 못지않은 잠재력을 잉태하고 있다. 소공인의 기술이 사장되면 제2의 성공 신화는 기약하기 어렵다. 1975년 설립해 소공인으로 출발한 삼영기계는 선박과 철도 엔진용 피스톤 분야의 세계 3대 제조업체로 성장했다.

다른 제조 강국도 마찬가지다. 1946년 창업한 일본 소니도 직원 7명의 소공인으로 시작했다. 일본 중기청은 제2의 소니를 키워내는 걸 핵심 목표로 삼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발상지는 휴렛팩커드(HP)가 1938년부터 음향 발진기를 만든 미국 캘리포니아주 팰러앨토의 허름한 창고다. 한국에도 소니, HP 신화 탄생을 이어가기 위해 과감한 지원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