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으로 큰 타격을 입었던 극장가는 최근 대통령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이라는 새로운 위기로 다시 한번 흔들리고 있다. '소방관'이 누적 관객 200만 명을 넘기며 의외의 흥행을 이어가고 있지만, 전반적인 관객 수는 크게 줄어든 상황이다.
영화진흥위원회 박스오피스 추이를 보면 탄핵 집회가 시작된 지난 6~8일동안 관객수는 163만 명으로 지난해보다 30만 명이나 감소했다. 지난 13~15일에도 극장은 153만 명이 찾았다. 이처럼 연말 특수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제작비 300억 원을 들인 '하얼빈'과 150억 원 규모의 '보고타'가 극장가에서 맞붙으며 치열한 빅매치를 예고하고 있다.
"까레아 우라!"...영웅이 필요한 시대에 온 현빈의 '하얼빈'
먼저 크리스마스 이브에 개봉하는 '하얼빈'은 지난해 '서울의 봄'으로 천만 관객을 들인 하이브미디어코프가 제작하고, '내부자들', '남산의 부장들'의 우민호 감독이 연출했다.
출연진 면면이 화려하다. 현빈은 조국을 빼앗긴 시대에 자신의 목숨을 건 작전에 나서야 하는 안중근으로 분했다. 그는 안중근의 외로움, 결단력을 보여주면서 인간적인 면모까지 드러내며 다양한 액션까지 소화한다.
박정민, 조우진, 전여빈, 유재명, 이동욱이 각각 안중근과 생사를 함께하는 독립군 역할을 맡고 박훈이 일본군 육군소좌를, 일본 명배우 릴리 프랭키가 이토 히로부미 역을 연기했다.
'또 안중근 이야기냐'라는 반응도 나올 수 있다. 이미 우리에겐 정성화의 안중근, 뮤지컬 '영웅'과 이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2022)를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안중근의 스토리를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변주했다.
영화는 객석까지 추위가 느껴질 만큼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을 안중근(현빈)이 홀로 걷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영화는 6개월에 걸쳐 몽골, 라트비아, 한국 등에서 촬영해 독립투사들을 대자연 속에 뒀다. 한국 영화로는 최초로 '듄' 시리즈와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에서 사용한 아리 알렉사 65 카메라로 전투신 등 주요 시퀀스를 촬영하기도 했다.
배우들을 블루 스크린에 세우는 것을 거부했던 우민호 감독은 "일제에 다 빼앗겨서 땅 한 평도 없을 때, 그들이 광활한 대지에 놓여있을 때 얼마나 서글펐을까"라며 "마음을 다잡고 목적을 향하는 이들에게 숭고한 마음을 느끼길 바랐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영하 40도의 추위에 맞서 두만강을 걸었던 현빈은 "체력보다는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영화"라며 부담감을 털어놨다. 그는 "존재감과 상징성이 큰 분이라 감당할 수 없을거라 생각하고 한 차례 고사했다"며 "우 감독이 시나리오를 수정하며 설득해 호기심이 생겼고, 이렇게 훌륭한 인물을 연기해 보는 것도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하얼빈'은 통쾌한 한방을 날리는 영화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시작과 밑거름에 관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탄핵 정국을 염두에 두고 "의도치 않게 이런 상황에 개봉하게 됐는데, 영화를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며 "관객들에게 희망과 용기가 되는 작품이었으면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언론 시사회를 통해 선보인 '하얼빈'은 300억 제작비의 가치를 실감할 만큼 압도적인 스케일을 자랑한다. 그러나 드라마틱한 전개보다는 인물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며 전반적으로 건조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영화적 몰입감을 위해 극장에서의 관람을 추천하지만, 감정의 폭이 크지 않아 강렬한 자극을 기대하는 관객들에게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얼빈'의 손익분기점은 약 650만 명. 개봉을 나흘 앞둔 20일,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이 영화는 전체 예매율 1위를 기록하며 예매량 20만 장을 돌파했다. 배급사 CJ ENM은 '베테랑2'(누적 관객 750만)의 성공 이후 '아마존 활명수'(누적 관객 60만)와 같은 작품에서 부진을 겪었지만, 이번 연말에는 '하얼빈'의 천만 관객 돌파를 목표로 단독 개봉이라는 전략을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아싸라비아 콜롬비아" 외칠 수 있을까...송중기의 '보고타'
올해 마지막날인 31일 개봉하는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이하 '보고타')는 MF 직후, 새로운 희망을 품고 지구 반대편 콜롬비아 보고타로 향한 국희(송중기)가 보고타 한인 사회의 실세 수영(이희준), 박병장(권해효)과 얽히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소수의견' 김성제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해발 2600m 안데스산맥 동부에 위치한 낯설고도 생소한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서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한국인들의 파란만장한 생존기에 범죄 드라마를 버무렸다.
'나르코스'와 같이 남미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마약이라는 소재를 배제하고, 의류 밀수라는 소재를 더해 한인들이 끊임없이 경계하고 의심하는 첨예한 갈등이 펼쳐진다.
한국 영화에서 처음으로 보고타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콜롬비아 하면 떠올릴만한 유명 관광지보다 이민자들의 땀, 현지인들의 삶이 묻어나는 일상의 공간들이 리얼하게 화면에 담겼다. 관객들은 한순간 콜롬비아로 이동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
이 영화는 '창고 영화'라는 인상이 강렬하다. 2020년 1월 크랭크인한 후 코로나라는 악재를 만나 촬영 중단과 재개의 과정을 거쳐 올 연말에야 빛을 볼 수 있게 됐기 때문.
김 감독은 "영화를 2년 반에 걸쳐 찍었고 1년 반 동안 후반 작업을 했다"며 "'보고타'가 5년 전에 찍은 영화라는 이야기가 속상했다. 촬영은 2023년에 끝났다"고 밝혔다. 이어 "난 이제 막 만들어낸 따끈따끈한 영화를 여러분에게 준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보고타'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송중기다. 그가 연기한 국희는 IMF 이후 가족과 함께 도망치듯 콜롬비아 보고타로 떠나온 뒤, 한인 사회의 최고 권력자 박병장의 밑에서 물불 가리지 않고 일하며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인물이다.
송중기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낯선 땅에 처음 도착한 소년의 모습부터 성공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30대 청년의 모습까지, 한 인간의 서사를 완성해 냈다. '빈센조', '재벌집 막내아들' 등에서 보여줬던 차가운 카리스마의 캐릭터와는 또 다른 거친 얼굴들과 자연스러운 스페인어 연기로 신선함을 자아낸다.
송중기는 "한 인물의 이렇게 긴 서사를 연기한 적은 처음이었다"며 "국희가 콜롬비아에 적응을 잘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머리를 짧게 자르고 귀걸이도 했다. 스페인어에도 집중해 국희가 제대로 정착했다는 것을 보여줘야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사를 외워서 하지 않고 애드리브도 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려 했다"고 말했다.
이국적인 풍광과 송중기의 매력은 눈길을 끌지만, 내레이션을 중심으로 한 서사 방식이 긴장감을 약화시키고, 점프컷으로 빠르게 전개되는 흐름은 완성도 면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손익분기점이 300만 명으로 '하얼빈'의 절반 수준이지만, 과연 이 영화가 극장가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