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암초에 걸릴 뻔한 K컬처, 그 위기를 넘어 [김희경의 컬처 인사이트]

입력 2024-12-23 08:20
수정 2024-12-23 08:21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2024년 연말 서울 여의도를 비롯해 전국 곳곳의 거리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2007)가 울려 퍼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응원봉을 흔들며 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어느 순간엔 신나게 춤을 추기도 했다.

2024년 한 해를 통틀어 가장 이색적이면서도 강렬한 장면들이 아니었을까. 올 연말 대한민민국 국민들은 민주주의의 위기와 정치적 대혼란에 봉착했다. 그런데 그 결과 조성된 집회 현장엔 불안과 두려움만이 만연하지 않았다. 오히려 K팝이 울려 퍼지는 등 커다란 축제의 공간이 형성되어 한결 가볍고도 즐거운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분열과 혼란의 정치를 통합과 성숙의 문화로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나아가 국민들은 스스로 K컬처의 위기를 막아냈다. 계엄령이라는 이례적이고 커다란 정치적 위기에 전 세계는 큰 우려를 나타냈다. 특히 영화, 드라마, K팝 등 전 영역에 걸쳐 글로벌 시장의 새로운 강자가 된 K컬처가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집회 현장을 K컬처 축제로 만들어 놓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저력에 전 세계 사람들은 다시 한번 감탄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놀라운 K컬처의 기적을 만든 주체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암초에 부딪힌 K컬처의 위기를 이겨낸 것도 결국 대한민국 국민이라 할 수 있다.
K컬처의 주역 MZ세대가 만든 K집회

올 연말 K컬처에 대한 해외 팬들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K컬처의 최고 기록을 세운 ‘오징어 게임’의 새로운 시리즈도 공개를 앞두고 있었다. 이를 비롯해 다양한 영역에 걸쳐 K컬처는 안정기와 성숙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12월 3일 일어난 비상계엄으로 하루아침에 한국은 ‘여행 위험 국가’가 되었다. 한국을 문화를 알고 싶고 직접 경험하고 싶어하는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그라들 수 있는 순간이었다. 또한 단순히 눈에 보이는 금액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K컬처의 커다란 무형의 가치가 곤두박질칠 뻔한 위기였다. K컬처가 아무리 멋지고 세련된 선진국형 문화와 콘텐츠를 보여주려 해도 소용없게 됐으니 말이다. 계엄령과 같은 후진국형 정치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나라의 문화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 위기의 순간에 국민들이 펼쳐 보인 것은 힙하고 유쾌한,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행위였다. 그 중심엔 K컬처의 기적을 직접 목격하고 확산시켜 온 MZ세대가 있었다. 이번엔 워낙 큰 정치적 사안이었던 만큼 전 세대가 집회에 참여하긴 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MZ세대가 명실상부한 주축이 되어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MZ세대는 시위, 집회와 가장 거리가 먼 세대로 여겨져 왔다. 기존의 특정 단체 등을 중심으로 진행된 무거운 분위기의 시위나 집회엔 참여하길 꺼려했기 때문이다. MZ세대는 이와는 정반대의 특성을 갖고 있다.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수평적 문화를 이루는 것에 익숙하며 자발적인 참여와 연대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K팝을 비롯해 다양한 K컬처를 접하는 과정에서 무엇이든 창조적인 행위로 발전시키는 ‘놀이하는 인간’의 특성도 갖추게 됐다. 이 같은 MZ세대들은 경직된 시위와 집회에도 신나는 놀이 문화를 접목해 완전히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1970년대 엄격한 단속에도 자유를 꿈꾸는 청년 문화가 확산됐던 것과 비슷하다. 당시 청년들은 다양한 형태의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장발과 통기타, 미니스커트와 청바지로 자신만의 개성을 발산했다. 어쩌면 과거와 현재는 물론 앞으로의 미래에도 대한민국과 K컬처가 버티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은 젊은 청년들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폭력의 반대편엔 늘 K컬처가

과거에 통기타와 청바지 등이 있었다면 이번엔 응원봉이 있었다. 응원봉이 가진 1차적 의미는 K팝 아티스트의 노래와 퍼포먼스를 즐기며 이를 응원하는 팬들의 마음에 해당한다. 여기엔 자신만의 취향을 확고히 정한 이후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주체성이 담겨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응원봉은 한발 더 나아가 위기의 순간에 들어 올린 연대의 상징적 도구가 되어가고 있다. 코로나19가 확산됐던 시기에도 K팝 팬들은 공연장에 갈수 없는 상황에 굴하지 않고 응원봉을 들었다. 각자의 집에서 K팝 아티스트의 온라인 생중계 공연을 보며 응원봉을 밝히고 전 세계 팬들과 함께 열렬히 응원했다. 고립이 아닌 연결로 전염병의 위기를 함께 극복해 나가자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같은 MZ세대의 지혜는 국내에서 발생한 정치적 위기의 순간에도 적극 발휘되었다. 게다가 응원봉은 기존의 촛불보다 더욱 사용하기 간편하고 편리해 많은 사람들의 동참을 이끌어냈다.

MZ세대가 좋아하는 K팝 자체가 집회 현장에 울려 퍼진 것도 커다란 파격이었다. 사람들은 묵직한 민중가요만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K컬처의 대표주자인 K팝을 틀어 가볍고도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다시 만난 세계’뿐만 아니라 에스파의 ‘Next Level’, 로제의 ‘APT.’ 등을 따라 부르며 신나게 춤을 추기도 했다. 그렇다고 최신곡만 흐른 것도 아니었다. 무한궤도의 ‘그대에게’, 진주의 ‘난 괜찮아’ 등으로 K팝 역사 전반에 걸쳐 노래가 흘러나왔다. 음악으로 세대 간 공감을 넓히고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독려한 것이다.

외신들은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지 못한 새로운 방식의 K집회를 잇달아 카메라에 담고 보도했다. AFP통신은 “K팝을 들으며 참가자들이 즐겁게 뛰어다니고 형형색색의 응원봉과 LED 촛불을 흔드는 등 댄스파티를 연상케 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통신은 “시민들이 시위에 들고나온 응원봉이 기존의 촛불을 대체하며 비폭력과 연대의 상징으로 떠올랐다”고 전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차세대형 민주주의의 모습”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MZ세대 특유의 유머와 재치에도 주목했다. 외신들은 ‘혼자 온 사람들’, ‘강아지 발냄새 연구회’, ‘꽃 심기 클럽’ 등이 적힌 기발한 깃발에 대해 소개하기도 했다.

문화예술인들의 선한 영향력 또한 큰 울림을 선사했다. 감독, 배우, 가수 등 다양한 사람들이 커피나 빵 등을 선결제하여 누구나 집회 현장에서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통해 대중이 느낀 불안과 우려에 공감한다는 취지를 드러내고, 그 자리엔 없어도 마음은 함께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렇게 K컬처의 놀라운 파급력을 만들어낸 창작자와 대중은 국가적 위기에도 하나로 연결되어 서로를 응원하고 다독였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시상식 연회에서 한 연설의 우리말 원문엔 이 같은 얘기가 적혀 있다. “그렇게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들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폭력의 반대편인 이 자리에 함께 서 있는 여러분과 함께, 문학을 위한 이 상의 의미를 나누고 싶습니다.”

문학뿐만 아니라 문화 전체가 그렇지 않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확산시켜온 K컬처는 항상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와 폭력적인 행위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그런 K컬처로 중무장한 국민들은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폭력에 맞서며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김희경 인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kimhk@inje.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