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부지런함' 없어지더니…" 무서운 경고 쏟아졌다

입력 2024-12-18 17:58
수정 2024-12-19 02:18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CEO)와 한국 대표 석학으로 구성된 한국공학한림원이 ‘K반도체’ 상황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진단했다. 이들이 꼽은 위기 이유는 ‘치열함과 부지런함의 부재’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반도체 분야에서 경쟁력을 잃은 한국을 상대나 해주겠냐는 격앙된 목소리도 나왔다.

공학한림원은 18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반도체특별위원회 연구 결과 발표회에서 초격차 우위를 보이던 K반도체 기술 격차가 눈에 띄게 좁혀졌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초당적 경제 법안으로 꼽히는 반도체특별법의 연내 처리를 촉구했다. 이 법안에는 반도체 분야 연구개발(R&D) 종사자가 주 52시간 이상 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관련 규정이 담겨 있다.

대만 TSMC 등 해외 경쟁사는 심야에도 연구에 몰두하지만, 한국은 경직적인 주 52시간 근무제 때문에 저녁이면 연구소 불이 꺼진다는 지적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몇 달만 뒤처져도 격차가 벌어지는 업계 특성을 고려할 때 특별법이 통과돼야만 고대역폭메모리(HBM) 기술 패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혁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주 52시간제는 반도체 전쟁을 하다가 갑자기 퇴근하는 것과 같다”며 “기술 독립 없인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도 없다”고 경고했다.

정부 지원이 주요국보다 부족하다는 비판도 나왔다. 미국은 반도체지원법으로 68조원, 유럽연합은 62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한국은 직접 보조금 없이 세액공제만 지원하고 있다. 한국의 반도체 인센티브는 세액공제를 포함해도 1조2000억원 수준에 불과하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K반도체 저력이던 치열함 사라져…지금 워라밸 챙길 때인가"
공학한림원 반도체특별委 연구결과 발표회“반도체 경쟁력을 잃은 한국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상대해 주겠습니까.”

18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 한국공학한림원 반도체특별위원회 연구 결과 발표회에 참석한 한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 최고경영자(CEO)는 “트럼프 당선인은 반도체와 테크 이해도가 깊다”며 “한국이 최고의 대미 협상 카드를 잃을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위기 경고한 테크 리더들
공학한림원에 몸담은 ‘테크 리더’들은 한국 반도체산업이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고 한목소리로 우려했다. 공학한림원은 인공지능(AI) 부상 등 기술 변곡점을 맞이하는 시기에 한국의 반도체산업 경쟁력을 높이려면 최고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는 공감대를 이루고 지난 2월 특위를 구성했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과 이혁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가 공동위원장을 맡고 공학한림원 회장인 김기남 삼성전자 고문이 의견을 보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시스템반도체 등 업계 관계자와 학계 전문가들이 특위에 참여했다.

이 교수는 기조연설에서 “대한민국 비밀 병기인 부지런함이 없어지고 있다”며 “30분만 더 하면 연구 결과를 얻을 수 있는데 퇴근하고 다음날 다시 시작해 집중력과 효율성을 낭비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반도체 인재 부족과 두뇌 유출이 심각하다는 지적도 내놨다. 이 교수는 “반도체 생태계에 인재는 유입되지 않는데 해외로 유출되는 수는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짚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는 2022년엔 국내 반도체 인력이 1784명 부족했지만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2031년엔 5만4000명가량 모자랄 것으로 전망했다.

발표회에선 반도체가 평생 직업이 되도록 사학연금과 같은 반도체 특별 연금법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반도체 장비 기업인 원익의 이현덕 부회장은 “반도체 연금과 관련해 업계 공감대는 형성돼 있다”며 “중소기업에 특히 더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위는 한국이 선도적 투자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며 반도체 제조업을 지키기 위해서는 적시 투자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메모리 기술 및 첨단 패키징 기술 등에 선제적 개발과 시설 적시 투자를 위한 300조원 규모의 재정 지원이 필요하고, 조성 중인 경기 용인 클러스터가 원활하게 추진되도록 용수 및 전기가 제때 제공돼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반도체 제조 기반 산업인 소부장의 경쟁력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문도 나왔다. 행사에 참여한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국내에서 생산한 소부장 제품을 국내 수요 기업에 판매할 경우 인센티브 지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패키징(후공정)산업 육성을 위해선 첨단 패키징 개발, 제조, 검증, 인증 평가를 할 수 있는 대규모 전문 공공연구기관을 구축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대만의 TSMC처럼 국가가 지분을 갖는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기업 ‘KSMC’를 만들고 대규모 재정을 투입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제언도 나왔지만, 참가자들의 동의를 얻지는 못했다. ○추락하는 반도체 대국 한국 반도체 대표 선수인 삼성전자의 상황은 녹록지 않다.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에서 대만 TSMC와의 격차가 계속 벌어지고 있어서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 3분기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9.3%로 직전 분기 대비 2.2%포인트 하락했다. TSMC는 64.9%로 같은 기간 2.6%포인트 상승했고, 3위 SMIC는 6%로 0.3%포인트 높아졌다. 삼성전자로선 TSMC가 아니라 SMIC 견제가 필요한 상황이다.

초격차를 유지하던 D램도 위기다.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PC용 D램 범용 제품(DDR4 8Gb 1G×8)의 지난달 평균 고정거래 가격은 1.35달러다. 지난 7월까지만 해도 2.1달러에 달하던 가격이 넉 달 만에 30% 넘게 폭락했다. D램 가격 하락의 가장 큰 원인은 중국이다. 중국 메모리 업체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와 푸젠진화(JHICC)는 기존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D램을 쏟아내고 있다.

공학한림원은 학계, 산업계, 국가기관 등에서 공학 기술 발전에 현격한 공적을 세운 우수 공학 기술인을 우대하는 국내 최고 권위의 학술 연구기관이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