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12월 18일 11:29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지난 50년간 한국의 대표 기간 산업으로 자리매김한 석유화학 산업의 위기가 심상치 않다. 제1 수출국이었던 중국의 공급 과잉과 중동 지역의 정유석유화학통합공장(COTC) 증설 등으로 국내 석유화학 업계의 부진이 장기화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석유화학제품 수출액은 457억 달러로 전년 대비 15.9% 감소했다. 국내 주요 나프타분해시설(NCC) 평균 가동률은 73%에 그쳤고, 에틸렌 스프레드는 손익분기점인 톤(t)당 300달러를 한참 밑도는 185달러를 기록했다. 주요 화학업체의 적자 폭도 확대되고 있다.
한국의 석유화학 산업은 생산능력 기준으로 세계 4위의 강국이지만, 현재 시점에서는 자원, 기술, 수요, 자본 어디에도 뚜렷한 강점이 없다.
화석연료가 생산되지 않는 비산유국으로서 원자재 수입에 의존하다 보니, 국내 석유화학 산업은 원가 경쟁력을 개선하는 데 한계가 있다. 또한 현재의 기술력과 생산은 대부분 범용 제품에 집중됐다. 내수 시장이 작기 때문에 중국 수출에 집중했지만, 이제는 수출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중국을 대체할 시장을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7대 석유화학 기지를 육성 중인 중국과 오일 머니로 무장한 중동에 비해 투자 자본이 앞서는 것도 아니다.
범용설비 통합하고 스페셜티 사업 확대해야구조적 불황에 빠진 석유화학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려면 과감한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화학업체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던 앞선 사례를 살펴볼 수 있다. 미국은 대형 화학업체가 정유 설비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석유부문과 화학부문을 통합하는 방식을 택했다. 미국에서는 원유와 가스를 생산할 수 있어 석유부문과 화학부문의 수직계열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반면 석유를 수입하는 일본은 정유사업과 통합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부 정책에 힘입어 설비 축소 및 폐쇄를 통해 과잉 설비를 해소하는 방식을 활용했다.
한국은 일본과 같은 원유 수입국이기 때문에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과잉설비를 줄이는 일본식이 적합하다. 구체적으로는 기업 통폐합 후 ‘팀 코리아’를 만드는 구조조정 방식을 하나의 대안으로 고려해 볼 수 있다. 현재의 석유화학 기업을 재편해 범용제품 생산 기업은 한두 개로 통합하고, 나머지는 스페셜티(고부가가치) 제조업체로 특화하는 투트랙 방식이다.
현재 NCC 설비는 울산에 2개, 전남 여수와 충남 대산에 각각 4개씩 존재한다. 지역 별로 운영하는 기업 주체가 제각각이다. 이들 설비 간 통폐합을 통해 가동률을 높이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설비는 폐쇄하거나 매각해 채산성을 확보해야 한다. 통합을 하면 중복된 시설을 조정해 관리, 인건비 및 기타 간접비를 절감할 수 있고, 시장 참여 플레이어가 줄면 불필요한 경쟁이 완화된다. 통합 법인은 점유율 확대를 통해 조달, 생산 및 유통에서 단위당 비용을 줄일 수 있고 원재료 구매에 있어서도 기존보다 이점을 누릴 수 있다.
범용 설비의 통합과 더불어 개별 기업에서는 스페셜티 제품으로 포트폴리오의 다각화 및 전문화가 필요하다. 중국 제품으로 대체가 쉽지 않은 정밀화학제품과 유럽 등 선진국의 플라스틱 규제에 대비한 바이오 플라스틱 등 친환경제품 개발로 중장기 지속성장을 모색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특별법 제정해 파격 지원해야구조조정은 채권 금융기관이 나서서 주도하고 독립적인 전문 경영인을 선임해 경영을 맡기는 형태가 바람직해 보인다. 전문 경영인 중심 경영은 불필요한 기존 지배구조 상의 이해관계를 배제하고 산업 경쟁력, 경영 효율성 제고에 집중할 수 있다.
구조조정을 유도한다는 기본 방침만 정해놓고 실행은 민간에만 맡긴다면,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상 기업들이 버티기에 나서면서 구조조정 시간이 지체될 공산이 크다. 두 기업 모두 버티기에 나서면 죄수의 딜레마 게임과 같아진다. 국내 석유화학 기업은 대부분 대기업집단에 소속되어 있다. 따라서 인수 합병 또는 통폐합 과정에서 자사의 이익을 위해 비협조적으로 임할 수 있어 자율적인 사업재편 방안의 타결에 난항을 겪을 수 있다.
이에 은행 등 채권금융기관이 수행해야 할 구조조정 전반의 조타수 역할도 막중하다. 범용 설비에 대한 산업구조 합리화와 스페셜티 등 미래에 대한 투자 과정에서 대규모 자금 소요는 불가피하다. 새로운 자금의 공급주체로서 금융기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한 이유다.
정부는 구조조정이 탄력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적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특별법을 제정해 파격 지원에 나서야 한다. 구체적으로 막대한 규모의 취득세와 양도차익에 따른 법인세 유예 또는 면제, 저금리의 정책자금 제공, 그리고 통폐합 이후 제기될 수 있는 독과점 문제에 있어 예외를 둬야 원활한 통합을 유도할 수 있다. 스폐셜티 제품으로 전환하려면 지속적인 연구개발(R&D)이 필요한데 관련 투자에 대한 세제 혜택도 확대되어야 한다. 지금이 구조조정의 골든타임구조조정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현재의 시장 및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과감한 구조조정만이 그나마 남은 골든타임을 지키는 길이다. 미국도 그랬고 일본도 구조조정을 통해 체질 개선을 이뤘다. 과거 현대차와 기아차의 결합은 국내 자동차 업계가 해외에 주도권을 뺏기지 않고 해외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으로 작용했다. 양사는 연구개발 부문 통합, 주요 부품 공유, 플랫폼 축소로 비효율성을 제거하고 규모의 경제를 극대화했다. 구매부문 통합으로 대량 구매의 이점을 활용해 부품원가도 절감할 수 있었다. 결합의 시너지 효과는 이후의 고속성장으로 이어졌다.
국내 석유화학 산업 역시 ‘산업의 쌀’인 에틸렌을 비롯해 주요 기초제품을 생산하며 50년 간 밝혀온 플랜트의 불꽃을 꺼뜨리지 말고 지켜내야 한다. 지금이 바로 ‘팀 코리아’로 거듭나 원가 경쟁력과 고부가가치 스페셜티 제품으로 무장해 세계 시장을 호령할 마지막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