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경제수장들 불러놓고 '내란죄' 공방 벌인 정치권

입력 2024-12-17 17:34
수정 2024-12-18 00:20
“끝까지 있고 싶지만 갑자기 일정이 바뀌었습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17일 오전 한은 별관에서 국제결제은행(BIS)과 함께 주최한 인공지능 관련 콘퍼런스에서 예정보다 일찍 자리를 뜨면서 이같이 양해를 구했다. 신현송 BIS 조사국장, 아누 브래드퍼드 미국 컬럼비아대 로스쿨 교수 등과 하기로 한 만찬 일정도 취소됐다.

이 총재는 이날 오후 석학들과 시간을 보내는 대신 국회를 찾았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함께 기획재정위원회에 출석해 ‘긴급 현안질의’에 참석했다.

국회는 현재 우리 경제 상황과 탄핵 이후 경제 회복 방안 등을 묻기 위해 이들을 불렀다고 했지만 실제론 달랐다. 여야가 계엄과 탄핵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을 하면서 상당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여야는 기재위 시작부터 ‘내란죄’ 발언을 두고 충돌했다. 정일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내란 비상계엄’이라는 표현을 수차례 사용하자 국민의힘 의원들이 “내란이라고 하지 말라”고 제지하면서다. 국민의힘에선 최은석·박대출 의원이 속기록 삭제 등을 요구했지만, 민주당 박홍근 의원 등은 물러서지 않았다. “조용히 해!” “입 다물어!” 등 고성이 오가는 동안 최 부총리와 이 총재는 15분간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현안 질의도 현재 경제 상황과는 무관한 내용이 많았다. 민주당 진성준·최기상·김영진 의원 등은 계엄 당일 최 부총리의 행적에 관한 질문을 쏟아냈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받았다는 ‘쪽지’의 형태와 내용에 대해 최 부총리는 같은 대답을 수차례 반복해야 했다.

최 부총리와 이 총재가 정작 경제 상황에 대한 질의에 답변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경제 현안을 묻고 싶어서 경제 수장을 부른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정쟁이 오가는 사이 경제팀의 손발은 묶였다. 이날 기재위가 열린 국회에는 최 부총리와 이 총재뿐 아니라 기재부, 한은 간부와 관련 직원 수십 명이 참석했다. 직원들은 질의응답 준비를 위해 상당 시간을 투입했고, 이날 오후와 저녁에 예정했던 일정도 대부분 취소했다.

이들은 비상계엄 선포 이후 혼란한 경제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 일선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국회가 이들의 시간과 노력을 국회에 할애하도록 할 것이라면 정치적 공방보다는 실질적인 경제 안정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데 함께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해외 신용평가사와 투자은행(IB)들이 ‘한국의 경제와 정치는 분리됐기 때문에 펀더멘털은 견고하다’는 메시지를 신뢰하도록 만드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