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한 에너지 기업 최고경영자(CEO) A씨는 지난주 국내 일정을 접고 미국과 아시아 사업장을 긴급 방문했다. 지난 3일 비상계엄 선포 직후 해외 사업 파트너와 정부 관계자들이 쏟아낸 우려에 직접 답하기 위해서다. A씨는 “대통령 탄핵 등 정치 리스크에 따른 혼란으로 해외 원료 조달 등 공급망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는지, 해외 투자 계획에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닌지 등을 집중적으로 물었다”며 “내년 상반기에 들어설 정부 성향에 따라 에너지 정책이 뒤바뀔 수 있는 점을 반영해 사업계획을 다시 짜기로 했다”고 말했다.
A씨 사례처럼 국내 30대 주요 그룹 중 60%가 내년 사업계획을 확정하지 못했거나 다시 수립할 것으로 조사됐다. 통상 대기업들이 11월 말~12월 초에 다음해 사업계획을 확정한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온다.
한국경제신문이 15일 삼성 SK 현대자동차 LG 등 국내 30대 주요 그룹(금융회사 제외) CEO를 대상으로 실시한 긴급 설문조사에서 10곳(33.3%)은 2025년을 보름 앞둔 시점인데도 내년 사업계획을 확정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8개 그룹(26.7%)은 탄핵 등 큼지막한 변수가 생긴 점을 감안해 사업계획을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이들 기업은 사업계획을 확정하지 못한 이유(복수 응답)로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 출범 등 대외 불확실성 확대’(55.2%)와 ‘탄핵 등 정치 리스크 확산’(44.8%), ‘내수 위축 심화’(31.0%) 등을 들었다.
내년 경영 환경에 대해선 90%가 “올해보다 나쁠 것”이라고 답했다. 이 중 4개 기업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한 해가 될 것”이라고 했다. 네 곳 중 한 곳꼴로 내년 투자 규모와 신규 채용을 올해보다 10% 줄이겠다고 밝혔다.
CEO들은 국회와 정부가 가장 시급하게 챙겨야 할 항목(복수 응답)으로 ‘정국 안정을 위한 신속한 조치’(70%), ‘환율, 증시 등 금융시장 안정 조치’(70%), ‘상법개정안 등 반기업 법안 폐기’(63.3%) 등을 꼽았다.
김우섭/황정수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