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준의 인문학과 경제] 다시 돌아온 크리스마스

입력 2024-12-15 17:08
수정 2024-12-16 00:02
최근 대한민국의 혼란은 정치 영역을 뛰어넘었다. 경제 영역을 강타해 무역, 환율, 주가 등에 상당한 피해를 발생시키고 있다. 대립하는 정치집단이 상대방을 경쟁자가 아니라 파괴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정치 문화는 이 사태가 발생하기 훨씬 전부터 뿌리를 다지고 있었다. 정치 싸움판이 격렬해질수록 특정 집단과 특정 개인이 챙길 이득이 커진다. 그러나 정치 싸움으로 국가 경제가 입는 손해는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이에게 분배된다. 특히 경제적으로 취약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볼 가능성이 높다.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는 힘들고 어려운 우리의 이웃들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가르친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다. 예수는 내 이웃뿐 아니라 심지어 원수도 사랑하라고 당부했다. 상대방 진영의 몰락을 위해 증오의 에너지를 긁어모으고 있는 이들의 귀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농담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당장 도움이 절실한 어려운 이웃을 기억하고 이들을 위해 작은 기부라도 하는 일은 진영을 넘어서 우리 모두 실천할 수 있다.

지금 이 나라 곳곳에서 정치 싸움의 확성기들은 저주와 증오의 언어를 쏟아낸다. 그 우렁찬 소리는 크리스마스 때면 어김없이 들리는 구세군 자선냄비의 미미한 종소리를 압도할 기세다. 구세군(Salvation Army)은 윌리엄 부스가 영국 런던의 노숙자와 극빈자들을 추위와 굶주림에서 구해내기 위해 1878년 구성한 도시선교 교단이다. 구세군이 한국에 들어온 역사는 제법 오래됐다. 아직 대한제국이 명목을 유지하던 1908년, 영국 선교사들이 ‘구세군 대한본영’을 서울 서대문에 세웠다. 자선냄비 운동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부터 시작됐다.

구세군 창립 당시 영국에서는 노동자 파업이 잦았다. 런던 부두의 비숙련 노동자들이 벌인 1889년 총파업은 특히 그 규모와 사회적 파장이 컸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참고 참다가 단체행동에 나설 때마다 다양한 종류의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지식인들은 흥분했다. 곧장 혁명으로 번지길 열망하는 이들도 있었고, 점진적 개혁의 촉매제이기를 기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방법론에는 차이가 있으나 자본주의를 대체할 사회주의로 체제가 변화해야 한다는 신념을 공유했다. 이런 진보적 지식인들은 파업하는 노동자나 길거리로 내몰린 실업자와 달리 먹고살 걱정이 없는 중산층이었다.

부스는 그의 저서 <영국의 오지, 또한 거기서 나오는 길>(1890)에서 혁명과 개혁을 설파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물었다. “다 좋은데, 당장 지금, 배고픈 저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대한민국 도시에서 들리는 구세군 냄비 종소리는 창립자 부스의 이와 같은 질문을 여전히 던지고 있다. 다 좋은데, 당장 지금, 생계가 위태롭고, 춥고, 배고프고, 외로운 우리의 이웃을 어떻게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