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가 ‘비상 계엄’ 사태가 벌어지기 직전 수준을 회복했다. 기관의 주식 순매수가 원동력이었다. 외국인은 현물 주식을 팔았지만 코스피200선물은 대거 사들였다. 코스피 회복에 베팅한 것이다. 외국인의 선물 매수는 기관 중 프로그램매매를 주로 하는 금융투자의 현물주식 순매수를 이끌었을 가능성이 크다.
외국인은 현물주식을 1조원어치 넘게 매도하는 와중에도 SK하이닉스, NAVER,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유한양행 등 성장 기대감이 큰 종목들을 사들였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13일 코스피는 2494.46에 거래를 마쳤다. 지난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의 기습적인 비상계엄 선포로 비롯된 정치적 불확실성 확대로 무너지기 시작한 코스피는 9일 2360.58까지 빠졌지만, 이후 4거래일 연속 오르며 낙폭을 거의 만회했다.
이경민 대신증권 연구원은 “외국인의 선물 매수와 기관의 프로그램 매수가 뚜렷했다”며 “개인의 순매도와 대비돼 기관과 외국인의 순매수가 코스피를 지지했다”고 설명했다.
계엄사태 이후 개인의 매도가 두드러졌다. 지난 4~13일 개인은 유가증권시장에서 1조8467억원어치 주식을, 코스닥시장에서 6353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코스피200선물도 2164억원어치 팔아치웠다.
기관이 코스피 편입 종목을 2조5219억원어치를 사들이며 지수를 방어했다.
외국인은 코스피 종목은 1조3430억원어치 순매도했지만, 코스피200선물을 1조1122억원어치 사들였다. 코스닥시장에서의 순매수 규모는 3781억원으로 기관(2923억원)보다 컸다. 정치 불확실성 고조로 개인의 투매가 나타나는 가운데 외국인은 코스피가 상승할 것이란 방향성과 코스닥시장의 개별 종목에 베팅한 것이다. 외국인이 순매수한 개별종목들은 정치적 불확실성이 고조되기 전부터 주식시장에서 성장 기대감에 주목돼왔다.
외국인이 가장 많이 사들인 종목은 2130억원의 외국인 자금이 유입된 NAVER다. 지난달 코스피가 출렁이는 가운데서도 실적 회복 기대감에 주가가 가파르게 올랐다가 계엄 사태로 주춤하자 외국인들이 매수 기회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 들어서는 인공지능(AI) 서비스의 수익 창출이 가까워졌다는 기대로 소프트웨어기업들에 대한 투자심리도 개선됐다. NAVER는 세계에서 초거대언어모델(LLM)을 구축한 몇 안 되는 플랫폼기업이다.
두 번째로 순매수 규모가 큰 종목은 SK하이닉스다. 계엄 사태 이후 8거래일동안 1949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SK하이닉스는 글로벌 주식시장에서 인공지능(AI) 테마를 주도해온 엔비디아에 고대역폭메모리(HBM) 반도체를 독점 공급하다시피 하면서 주가와 실적이 고공행진하고 있다.
외국인은 지난 4~13일에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현대로템을 각각 893억원어치와 404억원어치 순매수했다. 정부간 거래(G2G) 성격이 짙은 방산 분야는 비상 계엄 선포 사태로 인한 국가 신뢰도 하락의 대표적인 피해 섹터로 꼽히면서 주가가 크게 조정받았지만, 외국인은 이를 저가 매수의 기회로 활용했다.
519억원어치를 순매수한 두산에너빌리티도 마찬가지다. 특히 원전은 윤석열 정권이 성장시키기 위해 공을 들인 산업 분야다. 정권이 바뀌면 정부 지원이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로 계엄 사태 이후 두산에너빌리티 주가는 18.49%나 급락했다.
바이오 종목들도 외국인의 매수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올해 들어 잇따라 의약품 위탁 생산(CMO) 수주 소식을 전했던 삼성바이오로직스(771억원), 항암신약 레이저티닙의 미국 판매가 시작된 데 따라 내년부터 로열티 수입이 유입될 예정인 유한양행(729억원), 글로벌 바이오시밀러 산업을 이끌면서 의약품 위탁 개발·생산(CDMO) 분야 진출을 추진하는 셀트리온(437억원)을 외국인들은 순매수했다.
이외 크래프톤(827억원)과 엔씨소프트(330억원), JYP엔터(348억원) 등 내년 실적 개선이 기대되는 게임·엔터 종목도 외국인들의 계좌에 채워졌다.
반면 외국인들은 삼성전자를 7402억원어치 순매도했다. HBM 분야에서 SK하이닉스에 뒤쳐진 데다, 최근 들어서는 중국의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의 공급 확대에 범용 메모리반도체 시황 악화도 우려되고 있다. 또 윤석열 정부가 드라이브를 걸었던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정책의 대표적인 수혜 업종으로 꼽혔던 KB금융과 신한지주도 외국인 순매도 규모가 각각 4331억원과 1787억원에 달했다.
한경우 한경닷컴 기자 ca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