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했다. 문재인 정부가 드라이브를 건 ‘수소경제 활성화 정책’에 발맞춰 SK가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최 회장의 증인 출석은 막판에 보류됐지만 재계에선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한 대기업 임원은 “기업의 미래 사업 전략을 대놓고 공개하라는 발상에 기가 찼다”며 “사업 계획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 바뀌는데, 공개한 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책임도 묻겠다는 거냐”고 한숨을 쉬었다.
이런 황당한 상황이 내년부터 국회에서 일상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기업 기밀이라도 국회의원이 요청하면 서류로 제출해야 하고, 관련 기업인이 출석하도록 못 박은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국회증언법) 개정안’이 지난달 2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서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막힌 만큼 이 법은 이르면 내년 3월부터 시행된다. ○‘기업 옥죄기’…“무소불위 국회 된다”
국회증언법 개정안 가운데 기업과 관련한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①국회가 서류 제출 및 증인·참고인 출석 요구를 하면 개인정보 보호, 영업비밀 보호 등을 이유로 거부할 수 없고 ②증인·참고인은 해외에 있거나 투병 중이어도 화상을 통해 국회에 출석해야 하며 ③국정감사, 국정조사뿐 아니라 중요 안건 심사와 청문회 때도 국회가 요구하면 출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산업계가 가장 반발하는 대목은 ①번이다. 지금은 영업기밀에 해당하는 자료는 국회가 요청해도 제출하지 않아도 되지만, 법이 발효되는 내년 3월부터는 꼼짝없이 내야 하기 때문이다. A기업 관계자는 “인명사고 등을 빌미로 국회가 생산 관련 자료를 요청하면 고객사 리스트부터 원료구매처, 생산기법 등을 모조리 공개해야 한다는 의미”라며 “안 그래도 중국 업체들이 기밀을 빼가는 상황인데, 개정법이 시행되면 아예 통째로 기밀을 중국 업체에 넘겨주라는 것”이라고 했다.
기업들이 반발하기는 ②번도 마찬가지다. 해외에서 비즈니스 미팅을 하는 기업인도, 투병 중인 사람도 화상 통화로 국회에 불러 세운다는 의미여서다. 시차가 크게 차이 나는 해외에서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고객사와 만나는 기업인에겐 황당한 요구다. ③번도 기업인들이 부담스러워하는 대목이다. 국회의원들은 통상 10월 국감 시즌에 기업인을 무더기로 불러 밤새 세워놓는 등 ‘군기 잡기’에 나서는데, 앞으로는 1년 내내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국회의 기업인 호출이 늘고 있는데, 내년부터는 국회에 아예 상주해야 할 판”이란 불만이 나오는 이유다. 국회는 올해 국감 때 지난해(95명)보다 훨씬 많은 159명의 기업인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헌법, 기존 법률 위배 여지”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입법 취지에 대해 “정당한 사유 없이 국회에 출석하지 않고, 청문회에 동행명령할 수 없어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개정안이 헌법과 기존 법률에 위배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헌법이 규정한 ‘과잉 금지’ 원칙과 ‘사생활 침해 금지’ 원칙, 그리고 개인정보보호법이 정한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어서다. 이런 점을 감안해 강명구 국민의힘 의원은 당시 본회의에서 “국회가 동행명령장을 남발하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처벌할 수 있게 된다”며 “이는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두르겠다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국회 운영위원회도 검토보고서를 통해 “헌법에는 기본권을 제한할 때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런 취지를 위배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개정법이 국무회의를 거쳐 3개월 뒤 실제 시행되면 일부 기업을 중심으로 헌법소원을 낼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김형규/김우섭/성상훈 기자 k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