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의 고공행진이 이어지며 중간재·소비재 수입 업체는 물론 수출 기업과 은행에 비상이 걸렸다. 기업과 은행의 외화 빚이 처음으로 610조원을 넘어서는 등 빠르게 불어나 원금·이자 상환 부담이 급증했다. 외화 빚 비중이 높고 신용도가 취약한 중소·중견기업부터 휘청일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12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9월 말 국내 기업과 금융권의 대외채무 합계는 4298억6400만달러(약 614조7000억원)였다. 지난해 말에 비해 97억5200만달러(약 13조9500억원) 늘었다. 대외채무란 기업과 금융회사가 갚아야 하는 외화 빚(외화 차입금과 외화 사채, 유전스 등)을 뜻한다.
기업과 은행은 미국 대선을 비롯한 대내외 불확실성에 대비해 올 들어 외화 조달을 대폭 늘렸다. 하지만 불어난 외화 부채가 치솟는 환율과 맞물려 기업 실적을 갉아 먹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원·달러 환율은 비상계엄 사태 여파가 미치기 직전인 지난 3일 주간장에서 달러당 1402원90전에 마감했다. 계엄 사태 직후 오름세를 이어가며 9일 장중 1438원30전까지 치솟아 2022년 10월 24일(1439원70전) 후 최고가를 찍기도 했다.
환율이 뛰면 원화로 환산한 기업의 외화 빚 원금과 이자 비용 상환 부담이 커진다. 그만큼 순이익도 줄어든다. 원재료 수입 의존도가 높은 LG화학은 원·달러 환율이 10% 상승하면 순이익이 5919억원가량 감소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아시아나항공과 SK이노베이션도 환율이 10% 뜀박질하면 각각 순이익이 3645억원, 2818억원가량 깎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LG에너지솔루션 등 주요 수출 기업이 해외 생산시설 확충 등을 위해 해외 자금 조달을 늘리면서 고환율이 호재보다는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분석이다.
외화 부채 환헤지(위험회피)를 거의 하지 않는 중소기업의 타격은 더 심각할 것으로 전망된다.'달러 빚'에 피 마른다…환율 10% 뛰면 아시아나 이익 3600억 증발
은행·기업 '610조 외화부채'…수출 제조사 비명연 매출 2000억원가량을 올리는 수출업체 A사는 매년 꾸준히 순이익을 냈지만 올해는 환율 고공행진 때문에 손실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 회사는 중간재인 화학제품 등을 해외에서 들여오는데 이를 위해 은행에서 만기 3개월 무역차입금인 ‘유전스(USANCE)’로 달러를 조달한다. A사 관계자는 “팍팍한 살림의 중견기업이라 장기차입금은 언감생심”이라며 “환 헤지(위험 회피)도 하지 않다 보니 고환율에 그대로 노출됐다”고 토로했다. ○빚 부담 큰 중소기업부터 휘청치솟는 원·달러 환율에 수입업체는 물론 수출 제조업체에서도 우려가 커지고 있다. “환율이 오르면 수출업체 실적이 불어난다”는 건 옛말이라는 게 수출기업의 공통된 설명이다. 이자 비용과 원자재 도입 비용이 늘면서 실적과 채산성이 적잖게 훼손될 것으로 전망된다. 대기업보다 자금 여건이 열악한 중소기업 사정은 한층 심각하다.
12일 서울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30전 내린 1431원90전에 주간 거래를 마감했다. 이날 다소 주춤했지만 환율 고공행진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 노무라증권 등은 정치적 불확실성 탓에 내년 환율이 1500원까지 치솟을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수출기업들의 표정은 어둡다. 과거에는 환율이 상승해 원화 가치가 하락하면 수출이 불어나면서 기업의 실적이 뛰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연평균 원·달러 환율이 1276원40전으로 전년 대비 15.76%(173원81전) 치솟자 그해 경상수지(330억8760만달러 흑자)가 1998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요즘 사정은 다르다. 2021년 한국은행이 발간한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흑자 요인 분석’ 보고서와 2022년 산업연구원이 발표한 ‘원화 환율의 수출 영향 감소와 시사점’ 보고서는 “환율이 수출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복잡하게 얽힌 공급망 구조 때문이다. 해외에서 조달하는 원재료를 들여와 재가공해 수출하는 방식이 한국 수출기업 사이에서 자리 잡으면서 환율의 영향력이 반감됐다. 환율이 오르면 되레 비싼 돈을 주고 원자재 등을 사와야 하는 만큼 실적이 나빠질 우려가 커졌다. ○외화 빚 많은 항공·정유사 타격외화 빚이 많은 기업은 특히 환율 상승에 고심하고 있다. 원화로 환산한 이자 비용 부담이 커져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9월 말 기업의 대외채무는 1761억5060만달러(약 251조9000억원)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지난해 말보다 55억5650만달러(약 7조9500억원) 늘었다.
통상 유류비, 항공기 리스료 등을 달러로 내는 항공사, 원유와 나프타를 수입하는 정유·화학업체의 외화 빚이 많은 편이다. 환율에 따라 이들 기업의 실적 출렁임도 크다. 지난 3분기 보고서를 살펴보면 LG화학은 원·달러 환율이 10% 상승하면 순이익이 5919억원 감소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 밖에 아시아나항공(-3645억원), SK이노베이션(-2818억원), LG에너지솔루션(-2389억), 고려아연(-1335억원) 등도 원·달러 환율이 10% 상승할 때 순이익이 1335억~3645억원 줄어들 것으로 봤다. 순외화부채가 33억달러에 달하는 대한항공은 환율이 10원 오를 때마다 330억원 규모의 외화평가손실이 발생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만기가 1년 미만인 단기 외화 빚의 차환 리스크도 커질 수 있다. 9월 말 기업의 단기 외화 빚은 209억600만달러(약 29조900억원)에 달했다.
치솟은 환율은 기업 투자 위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국회예산정책처가 발표한 ‘원·달러 환율 변동이 실물경제 및 국내 물가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는 실질 환율이 1% 상승하면 설비투자는 0.9%가량 감소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해외에서 들여오는 원자재와 기계류 구매비용이 불어나기 때문이다.
김익환/최석철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