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는 공포를 먹고 자란다지만...[하영춘 칼럼]

입력 2024-12-18 15:11
수정 2024-12-19 19:57



2008년 9월 14일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했다. 설마설마 하던 글로벌 금융위기는 현실화했다. 공포에 휩싸인 월가는 패닉셀(panic sell)에 나섰다.

그로부터 한 달여 후인 10월 17일.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은 뉴욕타임스에 ‘미국 주식을 사라. 나는 사고 있다’는 칼럼을 기고했다. 그는 “미국과 해외 시장 모두 엉망진창이다. 실업률은 상승하고 기업 활동은 흔들릴 것이며, 두려운 경제지표가 이어질 것”이라고 전제한 뒤 “나는 미국 주식을 사고 있다. 주가가 매력적으로 보이면 벅셔해서웨이 주식을 제외한 나의 순자산은 전부 미국 주식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 이유에 대해선 “내 간단한 규칙은 다른 사람들이 탐욕을 부릴 때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할 때 탐욕을 부리는 것”이라며 “두려움이 널리 퍼져서 심지어 노련한 투자자들조차 잔뜩 움츠려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버핏은 당시 사탕 제조업체인 마스와 골드만삭스, 뱅크오브아메리카, 스위스리, 다우케미컬, 제너럴일렉트릭 등 6개 기업에 252억 달러를 투자했다. 그러나 웬걸. 10일 후인 그달 27일 월스트리트저널은 ‘버핏이 금융위기와 관련해 시장 상황을 잘못 내다본 것 같다’고 지적했다. 손실이 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CNBC방송도 ‘결론적으로 버핏의 최근 투자전략은 틀렸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5년 후 버핏은 대박을 쳤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사들인 6개 주식에서 5년 동안 99억5000만 달러를 벌었다. ‘공포에 사서 환희에 팔아라’, ‘증시는 공포를 먹고 자란다’ 등의 증시 격언이 다시 한번 회자됐다.

이런 격언은 국내 증시에서도 유효할까. 지난 두 번의 대통령 탄핵 때를 보자.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는 골이 제법 깊었다. 탄핵소추안이 발의된 그해 3월 9일 891.58이던 코스피지수는 탄핵이 기각된 5월 14일 768.46까지 하락했다가 10월 6일(887.45)에야 탄핵 이전 수준을 되찾았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는 딴판이었다. 탄핵소추안이 발의된 2016년 12월 5일 1963.36이던 코스피는 탄핵이 확정된 이듬해 3월 10일 2097.35로 오히려 올랐다. 전문가들은 두 번의 탄핵 때는 정치 이벤트보다는 국내외 경기 상황에 따라 주가가 움직였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윤석열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는 어떨까. 외견상 충격은 생각보다 덜해 보인다. 급락하던 코스피는 10일부터 12일까지 소폭이나마 반등했다. 하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다르다. 외국인과 개인은 압도적 매도우위를 보였다. 기관이 나홀로 떠받쳤다. 그렇지 않아도 올 국내 주가 등락률은 93개국 중 꼴찌(블룸버그)였다. 트럼프 2기 출범을 앞두고 내수는 침체 상태이고 생산과 수출마저 차질을 빚고 있다. 더욱이 이번 탄핵은 지난 두 번의 탄핵과는 다르다. 내란 혐의를 받는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다. K웨이브를 한순간에 날려버리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몇 곱절이나 더해버린 상황이다.

버핏은 자신의 가치투자나 역발상 투자가 미국 주식이어서 가능했다는 얘기를 했다. 2020년 벅셔해서웨이 주총에서는 “미국은 언제나 더 건강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며 “절대 미국에 반대로 투자하지 마라(Never bet against America)”고 권했다.

이렇게 보면 시장은 공포를 먹고 자란다는 격언은 미국에서나 통용될 듯하다. 최고통치권자가 자해해 버리는 한국에선 공포는 그저 공포일 뿐이다.




하영춘 한경비즈니스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