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문학이란 생명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하는 것"

입력 2024-12-11 17:59
수정 2024-12-11 18:00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소개하게 돼 영광입니다. 오서(author) 한강!”

10일(현지시간) 노벨상 기념 연회가 열린 스웨덴 스톡홀름 시청사 블루홀에 서툰 한국어 발음이 울려 퍼졌다. 사회자가 한국어로 한강을 부르자, 검은색 긴 드레스를 입은 한강이 옅은 미소를 띠고 단상에 올랐다.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입에 1200명 청중의 눈길이 집중됐다. ○서툰 한국어로 ‘오서 한강’ 호명한강이 광주에 살던 여덟 살 때 이야기로 운을 떼자 시끌벅적하던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한강은 영어로 “어느 날 오후, 산수 수업을 마치고 나오던 중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아이들과 건물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한 기억이 난다”며 “길 건너편에도 비슷한 건물의 처마 아래에 비를 피하는 사람들이 보였는데,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쏟아지는 비와, 팔과 종아리를 적시는 습기를 느끼며 어린 한강은 문득 깨달았다. ‘세상엔 수많은 1인칭이 존재하는구나.’ 한강은 “나와 함께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이들을 비롯해 길 건너편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나’로서 살고 있었다”며 “각자의 시선으로 비를 보고 있었고, 촉촉함을 느끼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수많은 1인칭 시점을 경험한 경이로운 순간이었다”고 덧붙였다.

1인칭으로 이뤄진 세상에 대한 깨달음은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로 이어졌다. 한강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이런 경이로운 순간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며 “언어의 실을 따라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다른 내면과 마주하곤 했다”고 밝혔다. 이어 “가장 어두운 밤에도 우리를 잇는 것은 언어”라며 “언어는 우리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이 세상에 잠시 머무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고 다른 사람의 1인칭 관점에서 상상하도록 만든다”고 했다.

한강은 “이런 언어를 다루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체온을 품게 된다”며 “문학을 읽고 쓴다는 건 필연적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하는 것과 같다”고 강조했다. 수상 소감 말미에 이르러 한강은 “(내가 받은) 문학상의 의미를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다”며 감사를 전했다. 한강의 소감 발표가 끝나자 청중은 침묵을 깨고 긴 박수를 이어갔다.

이날 연회장에 한강은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브 16세의 사위 크리스토퍼 오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입장했다. 남녀가 쌍을 이뤄 입장하는 전통이 있어서다. 한강은 국왕과 대각선으로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아 연회를 즐겼다. ○스웨덴 국왕이 직접 증서 수여올해 노벨상 수상자 중 유일한 여성인 한강은 연회에 앞서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에 이어 네 번째로 상을 받았다. 아스트디르 비딩 노벨재단 이사장은 시상식 개회사에서 한강에 대해 “역사적 트라우마를 배경으로 인간의 나약함을 깊이 탐구했다”고 소개했다.

시상식에서 한강은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직접 메달과 증서를 받았다. 한강이 받은 메달은 앞면에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의 얼굴이, 뒷면엔 한강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다른 수상자와 달리 문학상 수상자의 증서는 양피지로 제작됐다. 수상자 상금은 1100만크로나(약 14억3000만원)다. 한강이 상을 받은 직후엔 스톡홀름 왕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영국의 여성 오보에 연주자 겸 작곡가 루스 깁스가 작곡한 ‘암바르발리아(Ambarvalia)’를 연주했다.

한림원 종신위원 중 한 명인 스웨덴 소설가 엘렌 맛손은 시상식 연설을 통해 한강의 작품 세계를 설명했다. 맛손은 “한강의 주요 작품을 관통하는 색상은 흰색과 붉은색”이라고 밝혔다. 흰색은 한강 작품에서 내리는 눈으로 화자와 세계 사이에 보호막을 드리우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슬픔과 죽음을 상징한다. 붉은색은 생명을 상징하면서 한편으로 고통과 피, 상처를 의미한다는 설명이다. 맛손은 “한강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묘사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한 현실과 돌이킬 수 없는 상실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한강의 대표작 중 하나인 <작별하지 않는다>를 두고선 “한강의 작품은 결코 잊어버리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며 “(소설 속) 인물들은 상처를 입고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지만, 또 다른 발걸음을 내딛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