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선포와 탄핵 정국으로 경제 활력을 높이기 위한 법안 처리와 정책 결정이 잇달아 차질을 빚고 있다. 여야가 합의 처리하기로 한 반도체·인공지능(AI)산업 지원 법안은 줄줄이 지연되거나 ‘반쪽짜리’로 통과되고 있다. 대통령실 기능이 사실상 마비된 상황에서 소비 진작 대책 등 부처 간 협의가 필요한 정부 정책은 사실상 전면 올스톱됐다. 정치적 불확실성에 경기 회복의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11일 기획재정부 등에 따르면 반도체산업 지원을 위한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은 지난 10일 본회의에서 일몰 기한을 올해 말에서 3년 연장하는 내용만 통과됐다. 당초 여야는 반도체 투자세액공제율을 5%포인트 높이고 연구개발(R&D)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을 1%에서 20~30%로 높이기로 합의했지만 탄핵 정국을 맞아 야당이 태도를 바꿔 무산됐다. 반도체 R&D 종사자의 주 52시간 근로 규제 완화 방안이 포함된 반도체 특별법 논의는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중국의 저가 공세 등으로 위기에 처한 국내 반도체업계에서 경쟁력 회복에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AI 기본법, 전력망·고준위방사성폐기물·해상풍력 등 국가 에너지 시스템 관련 특별법 등도 여야가 연내 통과를 약속했지만 논의가 뒷전으로 밀렸다.
반면 야당이 지난달 28일 단독으로 통과시킨 양곡법·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법 개정안은 시행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정부는 쌀 과잉생산 유발에 따른 농업 붕괴, 매년 1조원 이상의 재정 부담 초래 등을 이유로 이들 법안을 강력 반대하고 있다. 법 시행을 막으려면 이달 21일까지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하지만 탄핵 정국에서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中 폭탄할인, TSMC 고객독식, 정치권은 무한정쟁…K칩 사면초가
트럼프 2기도 벅찬데 탄핵 정쟁…美·中·日, 정부가 지원군 자처
‘일모도원’(日暮途遠·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아직 멀다). 삼성전자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처한 현실을 한 전문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대만 TSMC와 미국 엔비디아, 퀄컴 등 글로벌 1위 업체들과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는데, 한참 아래 있던 중국 업체들이 어느새 턱밑까지 쫓아와서다. 대만과 미국, 중국 등 반도체 라이벌 국가들은 각종 보조금과 세제혜택으로 자국 기업을 대놓고 도와주고 있는 터. 보다 못한 우리 정부도 뒤늦게 반도체 지원법안을 만들어 세제혜택 등을 주기로 했지만, 탄핵 정국으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이러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반도체 전쟁도 끝난다”는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 반쪽짜리 K칩스법 국회 통과지난 1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에는 일몰기한을 올해 말에서 3년 연장하는 내용만 포함됐다. 새로운 세제혜택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여야는 앞서 반도체 등 국가전략기술 투자세액공제율을 기존 15%에서 20%로 5%포인트 올리고, 1%인 연구개발(R&D)용 시설투자 공제율을 20%로 높이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탄핵 정국에 휩쓸려 모든 논의가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반도체 연구인력에 한해 주 52시간 근로제 예외를 허용하는 반도체특별법은 논의 대상에 오르지도 못했다.
업계에선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나온다. 김정회 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은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트럼프 2.0 시대’를 앞두고 우리 기업들이 기댈 곳은 한국 정부와 정치권밖에 없었다”며 “K칩스법이 반쪽짜리로 전락하면서 우리 기업들이 반격의 기회를 놓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했다. ○ 中 저가 공세 파운드리로 확산엄살이 아니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는 스마트폰, PC 소비 침체와 중국 창신메모리(CXMT)의 저가 물량 공세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이로 인해 물량 기준으로 D램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범용 제품 가격은 급락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PC용 D램 범용 제품(DDR4 8Gb 1Gx8)의 평균 고정 거래가격은 지난 7월 2.1달러에서 11월 1.35달러로 35.7% 떨어졌다. 문제는 D램 가격 하락세가 최신 규격 D램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PC용 DDR5 16Gb 제품의 평균 고정거래가격이 지난달 3.7% 하락한 게 대표적이다.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파운드리 상황은 더 심각하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삼성전자 점유율은 올 2분기 11.5%에서 3분기 9.3%로 추락했다. 같은 기간 세계 1위 TSMC의 점유율은 62.3%에서 64.9%로 상승했고, 3위 중국 SMIC는 5.7%에서 6.0%로 뛰었다. TSMC가 3나노미터(㎚) 등 첨단 공정에서 독주하고, SMIC는 ‘40% 폭탄 세일’을 앞세워 10㎚ 이상 성숙 공정에서 ‘한국 점유율 뺏기’에 나선 결과다. 중국 파운드리 기업의 영토가 넓어지면 삼성전자뿐 아니라 DB하이텍, SK키파운드리 등 국내 중소 파운드리 기업들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중국과의 출혈 경쟁이 시작되면 2년 전 90%대 중반에서 올 3분기 70%대 중반까지 내려온 한국 파운드리 기업의 성숙 공정 가동률은 한층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美·日 정부는 기업 지원 적극적반도체업계에선 정부와 여야가 하루빨리 반도체 지원법을 다시 통과시켜야 한다고 호소한다. 경쟁국들은 반도체 기업 지원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은 최근 자국 기업인 마이크론에 61억6500만달러(약 8조8500억원)에 달하는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일본 정부는 자국 파운드리 기업 라피더스에 2000억엔(약 1조8000억원)을 추가 지원할 계획이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이날 열린 일본 최대 반도체 전시회 ‘세미콘 재팬’ 축하 영상에서 “(반도체 투자를) 정부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강조했다.
박진섭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정치적인 상황이 어렵지만 보조금 등 지원을 늘리고 주 52시간 문제 등을 풀 수 있는 반도체 지원 법안을 재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경민/황정수/박의명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