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엔 ‘앵커 베이비(anchor baby)’라는 말이 있다. 닻을 내려 배가 정박하듯 미국 태생 자녀가 부모의 닻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미국에서 태어나 자동으로 시민권을 얻는 자녀를 통해 미국에 쉽게 정착하려는 원정출산 관행을 비꼬는 말로 쓰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최근 NBC방송 인터뷰에서 이런 원정출산 문제를 뜯어고치겠다고 선언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원정출산을 근절하기 위해 관광비자 발급을 어렵게 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을 준비 중이라는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도 나왔다.
트럼프는 오래전부터 앵커 베이비를 비판해 왔다. 첫 대선에 출마한 2016년부터 줄곧 미국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시민권을 주는 이른바 ‘출생시민권’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웃기는 제도”라고 날을 세웠다.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18년과 2019년엔 잇따라 출생시민권 제도를 바로잡겠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말뿐이었다.
출생시민권은 대통령 행정명령 하나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 수정헌법 14조엔 미국에서 태어나면 부모의 시민권 여부와 관계없이 시민권을 보장받는다고 규정돼 있다. 남북전쟁 이후인 1868년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흑인들에게 시민권을 주기 위해 추가한 내용이다. 현실적으로 트럼프가 택할 수 있는 길은 개헌인데 말처럼 쉽지 않다. 미국 헌법을 개정하려면 연방 상·하원에서 3분의 2 이상 찬성표를 얻고 50개 주 중 4분의 3 이상 주에서 승인받아야 한다.
이번엔 다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1기 행정부 때와 달리 상·하원을 모두 공화당이 장악한 데다 공화당 우세 주도 늘어 난공불락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더 강경한 국경 대책으로 백인뿐 아니라 히스패닉·흑인 시민권자 득표율을 높인 트럼프이기에 이전보다 이민자 단속 의지가 강하다는 점도 그런 전망에 힘을 실어준다. 트럼프가 험난한 개헌 카드 대신 보수 우위인 연방 대법원 판결을 통해 출생시민권 제도를 손볼 것이란 분석도 있다. 이번엔 트럼프가 말폭탄에서 벗어나 150년 전통의 미국 출생시민권 제도를 바꿀 수 있을까.
정인설 논설위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