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12월 08일 17:25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자사주 대차거래' 카드가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의 경영권 방어책으로 떠오르고 있다.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를 우호 세력에게 빌려줘 의결권을 되살린 뒤 다음달 열리는 임시 주주총회에서 MBK파트너스·영풍 연합이 추천한 인사들의 이사회 진입을 막는 방식이다. 이 자사주는 당초 소각을 통한 주주가치 제고를 목적으로 사들인 만큼 이를 경영권 방어에 활용하는 건 '꼼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경영권 분쟁 상황에 자신의 우호 세력에게 자사주를 빌려주는 것 자체가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법원에서 치열한 공방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대차거래 가능할 경우 지분 경쟁 역전될 수도8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다음달 23일 임시 주총을 앞두고 고려아연이 보유 중인 자사주 12.27%를 우호 세력에게 빌려주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이를 제3자에게 빌려주면 의결권이 되살아난다. 예를 들어 최 회장의 우군인 글로벌 사모펀드(PEF) 운용사 베인캐피탈에 자사주를 빌려줘 임시 주총에서 의결권을 행사한 뒤 이를 다시 돌려받는 식이다.
고려아연이 지난 10월 공개매수로 사들인 자사주 9.85%는 내년 4월 말까지 6개월간 제3자에게 처분도 불가능해 자사주의 의결권을 살리는 방안은 사실상 대차거래가 유일하다. 처분 금지 기한 동안 우리사주조합에 자사주를 넘기는 건 예외적으로 가능하지만 이 역시 경영권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 업무상 배임에 해당한다는 판례가 있어 쉽지 않다.
최 회장과 특수관계인이 보유한 고려아연 지분은 17.5%로 MBK 연합이 확보한 지분(39.83%)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최 회장의 백기사 추정 지분을 모두 더해도 약 35% 안팎에 불과한 상황이다. 하지만 대차거래로 12.27%에 달하는 자사주의 의결권이 되살아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최 회장 측이 단번에 MBK 연합이 보유한 지분율 뛰어넘을 뿐 아니라 캐스팅보트로 꼽히는 국민연금(4% 안팎 보유 추정)이 MBK 연합의 손을 들어주더라도 최 회장 측이 지분율 경쟁에서 앞설 가능성이 크다.
최 회장이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물론 임직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임시 주총 승리를 자신해왔다. 자사주 대차거래 가능성이 거론되는 건 이 때문이기도 하다. 최 회장은 지난달 말 고려아연 울산제련소를 찾아 임직원들에게 "(MBK 연합과의 경영권 분쟁에서) 무조건 이긴다"고 말하기도 했다.
경영권 분쟁 중 자사주 대차거래 가능할까다만 최 회장 측이 소각 목적으로 사들인 자사주를 원래의 목적과 달리 자신의 경영권을 방어하는 데 활용한다면 많은 논란이 예상된다. 최 회장 측은 앞서 자사주를 공개매수할 때부터 목적을 소각을 통한 주주가치 제고라고 밝혔고, 법원에서도 이런 목적을 강조해 MBK 연합이 제기한 가처분 소송에서 승소했다. 이런 약속과 달리 자사주를 즉각 소각하지 않고, 자신의 경영권 방어에 사용하기 위해 대차거래에 나서는 건 임시 주총이 끝난 뒤 다시 돌려받아 소각을 하더라도 편법에 가깝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경영권 분쟁 상황에서 자신의 우호세력에게 자사주를 빌려줘 의결권을 되살리는 행위 자체가 위법이라는 지적도 있다. 경영권 분쟁 상황에서 경영권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제3자 배정 유상증자는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자사주의 대차거래도 그 목적이 경영권 방어라면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경영권 방어를 목적으로 자사주를 대차거래한 사례가 없어 위법 여부에 대한 의견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엇갈린다.
최 회장 측이 이런 편법을 사용한다면 MBK 연합은 해당 자사주에 대한 의결권 행사 금지 가처분 신청 등으로 제지가 가능하다. 다만 시간이 촉박하다. 최 회장이 오는 20일 주주 명부 폐쇄를 앞두고 2거래일 전인 18일까지 대차거래로 자사주를 우호 세력에게 넘긴다면 MBK 연합은 소송 등의 절차를 거쳐 다음달 초에나 고려아연 주주명부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 때 가처분 소송을 내더라도 다음달 23일로 예정된 임시 주총 전까지 결과가 나올 수 있을지 미지수다. 본안 소송이 아닌 가처분 소송 특성상 법원이 분쟁 중인 기업이 꺼내든 방어 수단에 제동을 걸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문제다.
최 회장 일가와 우군인 베인캐피탈이 최근 장내에서 고려아연 지분을 사들이며 고려아연 주가를 끌어올리는 것도 대차거래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라는 분석도 있다. 최 회장의 가족들과 최 회장 일가의 지배력이 강한 고려아연 계열사는 지난달부터 장내에서 공격적으로 고려아연 지분을 쓸어 담고 있다. 베인캐피탈도 지난달 25일부터 장내매수 전쟁에 참전해 지난 6일 장중에 고려아연 주가가 240만원까지 치솟기도 했다. MBK 연합이 고려아연 주가에 최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자유재량(CD) 매매 방식으로 증권사에 주식 매매 주문을 일임해 조심스럽게 지분을 사들인 것과는 전혀 다른 행보다.
IB 업계 관계자는 "주가가 뛰고, 주식의 희소성이 높아질수록 주식을 빌려주고 받는 수수료도 높아진다"며 "현 상황에서 대차거래를 하지 않고 자사주를 가만히 묵혀두는 건 배임이라는 논리로 대차거래를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자사주 대차거래 방안을 검토한 적 없다"며 "고려아연의 경영진과 임직원은 시장과 주주들의 신뢰를 지키면서 MBK 연합의 공세를 막아내고자 한다"고 해명했다.
박종관 기자 p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