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이'에게 가장 하고픈 말은…"고생 많았어 그리고 고마워"

입력 2024-12-05 18:33
수정 2024-12-06 02:43

“‘정년이’한테 말해주고 싶어요. 고생 많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얼마 전 종영한 인기 드라마 ‘정년이’의 원작 웹툰을 만든 서이레 작가(32·사진)의 말이다. 그는 웹툰 작가지만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 기획과 스토리를 담당하는 글 작가여서다. 그는 “‘정년이’는 내게 ‘계속 이런 이야기를 써도 괜찮다’며 등을 두드려준 작품”이라고 했다. 최근 첫 산문집 <미안해 널 미워해>를 낸 그를 최근 서울 중림동에서 만났다.

1950년대 열성 팬을 몰고 다닌 여성 국극단을 소재로 한 웹툰 ‘정년이’는 서 작가가 글을 쓰고 나면 그림 작가가 그림을 그리며 2019년부터 4년간 연재됐다. 부천만화대상과 웹툰 최초 양성평등문화콘텐츠상 등을 받은 뒤 지난해 3월 국립창극단에 의해 창극으로 만들어져 전 좌석을 매진시켰다. 최근 배우 김태리 주연의 드라마로 제작돼 최고 시청률 16.5%를 기록했다.

국문학을 전공한 서 작가는 학부 시절 현대문학사 수업에서 우연히 여성국극에 대한 논문을 읽고 영감을 받았다. 자료가 많지 않아 전국의 도서관을 뒤지고 일본 다카라즈카 극단(여성으로만 구성된 일본의 가극단) 공연까지 직접 보러 가며 작품을 준비했다.

‘정년이’의 연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 작품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을 거라고 생각한 이는 드물었다. 서 작가 본인조차 예상치 못했다고. 여성 인물들만 등장하는 이야기에 동성애 서사, 국극이란 낯선 소재 등이 기존의 흥행 공식과 거리가 멀어서다.

“소수자의 목소리가 담긴 작품을 쓰고 싶었어요. ‘정년이’가 받은 사랑은 이런 작품을 앞으로 계속 써도 괜찮다는 응원과도 같았죠. 맏딸의 직업을 마땅찮아 하던 어머니도 ‘정년이’를 보고 ‘이렇게 사랑과 용기를 주는 이야기를 하는 줄 몰랐다’며 처음으로 인정해 주셨죠.

서 작가는 이번 산문집을 통해 처음으로 픽션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 고교 시절 만화 동아리에도 들 만큼 만화를 사랑했지만, 그림 그리는 재주는 부족했다. 대신 글을 써서 그림 잘 그리는 친구들을 찾아가 같이 완성해보자고 꼬드겼다. 그때부터 그림 작가와 협업이 필수인 웹툰 스토리 작가의 맛을 본 셈이다.

“웹툰이란 장르는 ‘글쟁이’에게 매력적이에요. 소설보다 다양한 독자를 만날 수 있고, 영화와 드라마 대본에 비해 장르나 상상력의 제한이 덜하죠. 글이 곧바로 시각화된다는 것도 특별한 일이고요.”데뷔작 ‘보에’부터 ‘정년이’까지, 서 작가에게 모든 작품은 애증의 대상이다. 산문집 제목의 미안함과 미움이 향하는 곳은 바로 자신의 글이다.

“내 작품과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완성된 원고를 보면 다시 보기 힘들 정도로 부끄러워요. 좀 더 잘하고 싶은 마음과 작품에 투영된 나의 내밀한 모습이 섞여 복합적인 감정이 몰려오곤 해요.” 서 작가는 이번 책에서 “균열을 내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썼다. 누군가의 고통에 같이 아파할 줄 알면서 잘못된 관습에 금이 갈 때까지 돌을 두드리는 글이, 그가 쓰고 싶은 글이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나의 우주가 부서지는 경험을 하며 경외심이 들었고, 그런 경험을 하게 만드는 글을 쓰고 싶어요. 차기작은 미등록 이주 아동의 이야기입니다.”

신연수 기자/사진=이솔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