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조만간 석유화학업계의 구조조정과 규제 완화를 논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를 이끌어야 할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 국무위원 전원이 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관련 회의가 언제 열릴지 가늠조차 못 하고 있다. 중국발(發) 공급 과잉 수요 부진 속에 인수합병(M&A) 지원 등을 기대했던 업계에선 “생존을 위한 ‘골든타임’이 허무하게 지나가고 있다”는 탄식이 나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령 선포에 따른 후폭풍이 산업계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다. ‘선진국 한국’에서 벌어진 계엄령으로 인한 대외 이미지 실추에다 환율 등 거시 경제 상황이 급변하면서 경제계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시계 제로’ 상황에 빠졌다. 고액 연봉을 받는 엔지니어 등 화이트칼라를 주52시간제 적용에서 제외하는 방안 등 정부가 약속했던 반도체 분야 규제 완화와 지원책 등도 물 건너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4일 삼성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 등 주요 대기업에선 전일 밤부터 이날까지 계열사별로 대책보고와 오전 회의가 숨 가쁘게 진행됐다. SK그룹은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주관으로 주요 경영진이 참석하는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HD현대그룹 역시 긴급 사장단 회의를 열었다. 권오갑 HD현대 회장은 “비상경영상황에 준하는 인식을 가져야 하며, 환율 등 재무 리스크를 집중 점검해 줄 것”을 주문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는 항공기 운항이 예정대로 진행되는지 밀려드는 문의에 밤샘 대응을 했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미국과 영국 등에서 자국민 보호를 위한 여행주의보를 발령한 탓에 방문객이 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예정됐던 경제계 행사도 줄줄이 취소됐다. 이날 열리기로 했던 산업통상자원부와 국내 반도체 장비업체 간 간담회가 취소됐다. 민관은 지난 2일 미국 상무부가 발표한 대중 반도체 수출 제재에 따른 대책을 논의할 예정이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참석할 예정이던 상법 개정안 토론회도 취소됐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기업들은 정부와 여당이 약속한 반도체특별법 등 규제 완화와 산업 지원 대책이 무산되거나 연기될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탄핵 정국에 접어들면 정책 법안 논의가 줄어들 것”이라며 “재계에선 내년 사업 계획을 원점에서 다시 짜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민주노총이 무기한 총파업에 들어가면서 산업 현장이 멈출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내년 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임기 시작을 앞두고 정부의 협상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반도체와 배터리, 자동차 등 주요 제조 기업이 미국에 수십조원 규모의 투자를 단행한 터라 정부 차원의 외교력 지원이 절실하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 반도체지원법(칩스법)의 보조금 축소 및 관세 확대 등과 관련해 정보 공유 및 대응이 필요하다”며 “구심점이 사라진 상황에서 제대로 된 협상이 될지 걱정된다”고 했다.
김우섭/신정은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