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떠난 뒤 지급되는 사망보험금을 생전에 관리하는 게 가능해졌다. 정부가 사망보험금 청구권을 신탁할 수 있도록 관련 제도를 개정하면서다. 사망보험금을 금융회사에 맡겨 운용하고, 미리 정해진 조건에 따라 가족에게 지급하도록 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망보험금 신탁을 활용하면 자녀의 생애주기에 맞춰 보험금을 지급해 자립을 돕거나 수익자를 확실하게 지정해 유족 간 갈등을 방지할 수 있다.○‘5000만원’ 가입자도 다수
신탁은 일정한 목적에 따라 재산 관리와 처분을 남에게 맡기는 금융 제도를 말한다. 재산을 맡기는 위탁자와 관리하는 수탁자, 이익을 전달받는 수익자로 구성된다. 신탁의 장점은 크다. 건강히 살아있을 때뿐만 아니라 의식이 온전하지 않거나 죽어서도 보험금을 미리 정한 조건대로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망보험금 신탁을 활용하면 사후에 지급되는 보험금이 자녀 등 수익자에게 어떤 시점에 어느 정도 지급될지 미리 설정할 수 있다. 특정 자녀나 배우자를 위해 남겨둔 보험금이 연락을 끊고 살던 다른 가족에게 무분별하게 상속되는 것도 방지할 수 있다.
최근 사망보험금 신탁이 허용되면서 금융사들은 잇달아 고객을 적극적으로 끌어모았다. 제도가 시행되자마자 계약에 나선 가입자를 살펴보면 세세한 조건을 달아 계약을 맺은 것으로 나타났다. 재산 관리 경험이 부족한 미성년자 또는 장애인 등이 보험금을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지원하기 위해 일시금이 아니라 분할로 지급되도록 규정한 사례가 많았다는 게 여러 금융사의 설명이다.
삼성생명에 따르면 김모씨(46)는 홀로 키워 온 자녀가 아직 어린 만큼 경제 관념이 형성된 이후 보험금이 지급되길 원해 신탁 계약을 맺었다. 이에 자녀가 각각 만 25세가 되는 시점 생일달부터 매월 돈이 지급되는 구조로 설계했다. 또 자영업자 최모씨(66)는 자신의 사망보험금 3억원이 손자녀 3명의 대학 학비로 사용되길 희망했다. 손자녀 3명이 성인이 되는 시점에 1억원씩 지급하도록 했다.
이모씨(57)는 사망보험금이 지적장애 자녀를 위해서만 사용되길 원해 신탁에 가입했다. 사망보험금 수령일에 일단 5000만원을 일시적으로 자녀에게 주고 그다음부터는 10년간 월 300만원, 그 뒤로는 매월 250만원씩 지급하도록 세세하게 설정했다.
사망보험금이 커야만 신탁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3억원 미만의 사망보험금 가입자도 상당수인 것으로 나타났다. 김모씨(69)는 사망보험금이 손자의 결혼 축하금으로 지급되길 원해 5000만원 상당의 보험금 청구권을 신탁했다. 손자가 결혼할 때 보험금이 일시에 지급하도록 설계했다. 삼성생명 관계자는 “자녀의 대학 졸업, 결혼 등 유가족의 의미 있는 시점에 고인을 기억할 수 있는 용도로 지급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교보생명에 따르면 신탁 사망보험금은 3000만원~1억원이 52%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1억~5억원(41%), 5억~10억원(5%), 10억원 이상(2%)이 뒤를 이었다. 보험금 지급 방식은 ‘(미성년)자녀 양육비, 교육비 월 분할지급’이 54%로 가장 많았다. 이어 ‘배우자 생활비, 의료비 등 월 분할지급’(22%), ‘부양가족 생활비 분할지급’(21%), ‘미성년 자녀 성인 이후 일시지급’(3%) 순이었다.○수익자는 배우자·직계가족 한정사망보험금 신탁에는 제한 요건도 있어 유의해야 한다. 일단 보장 대상이 3000만원 이상 일반 사망 보장에 한정된다. 아울러 재해·질병사망 등 특약사항으로 획득한 보험금청구권은 신탁할 수 없다.
또 신탁이 가능한 보험 구조는 보험 계약자, 피보험자, 위탁자가 동일인인 경우로 한정된다. 수익자도 직계존비속(부모, 조부모, 친자녀, 손자녀 등)과 배우자만 가능하다. 신탁 계약 시 보험계약대출(약관대출)은 없어야 한다.
보험금청구권 신탁은 삼성생명 한화생명 교보생명 흥국생명 미래에셋생명 등에서 가입할 수 있다. 국민 신한 하나 우리은행에서도 가능하다. 각 금융사는 신탁 고객을 적극 모집 중이다. 22개 생명보험사의 사망 담보 보험금은 총 883조원에 달하는 만큼 놓칠 수 없는 시장이라고 판단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부자 전용으로 여겨진 신탁 서비스가 보험금청구권 상품 출시를 계기로 크게 대중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