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반도체 업황 개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AI)이 주도하고 있는 사이클에서 주요 고객사인 빅테크(거대 기술기업)와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사업자(CSP)들의 설비투자(CAPEX)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민규 상상인증권 연구원(사진)은 25일 한경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지난해 반도체 다운사이클(침체기)의 기저효과로 올해 CAPEX 규모는 전년보다 큰 폭의 증가율을 기록했다"며 "기저효과가 감소하는 내년에는 전년 대비 증가율이 둔화하겠지만 절대 규모는 확대될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내년 메모리 반도체 수요는 전반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정 연구원은 내다봤다. 그는 "특히 데이터센터와 AI 디바이스(기기) 등 AI 반도체 수요의 급성장이 지속될 것"이라며 "D램과 낸드 모두에서 데이터센터 수요는 비트 기준 30% 수준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의 공세는 가격 하락을 이끌 변수로 지목된다. 정 연구원은 "내년에도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와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 등 중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의 공격적인 생산능력 확대와 범용 반도체 위주의 출하량 증가 영향으로 혼합평균판매단가(Blended ASP)의 일시적 하락이 이어질 수 있다"며 "이에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eSSD) 등 고부가 제품 생산 비중을 늘리고 있는 국내 메모리 업체들은 그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전략을 시행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더블데이터레이트(DDR)4와 같은 레거시(범용) 메모리 가격 하락을 이유로 DDR5도 덩달아 하방 압력을 받는 모습이 관측된다"며 "내년엔 산업 내 비트 수요 기준 DDR4 비중이 10% 미만으로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DDR4 비중을 줄이고 DDR5를 늘리고 있는 메모리 3사(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의 수익성 하락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봤다.
다만 그는 "최근 CXMT의 DDR5 양산 제품이 탑재된 D램 모듈 출시 소식이 확인되고 있다"며 "메모리 3사 대비 수율과 성능 면에서 뒤처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급증하는 생산능력을 기반으로 DDR4에 이어 DDR5의 시장 교란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고 짚었다.
무엇보다 내년에도 HBM 시장을 둘러싼 메모리 3사의 경쟁이 보다 치열해질 것이란 관측이다. 엔비디아의 블랙웰 제품군들을 위한 HBM3E가 메인스트림(주류)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정 연구원은 짚었다. 내년 하반기로 갈수록 HBM3E 12단의 출하 비중은 높아질 것이란 전망이다.
이 같은 상황이 예상되는 가운데 SK하이닉스는 내년에도 엔비디아 HBM 공급망에서 기술과 수율 리더십을 바탕으로 선점 효과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HBM3E 12단의 수율이 빠르게 안정화되고 있어, 경쟁사보다 높은 이익률을 기록할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정 연구원은 "SK하이닉스는 지난달 SK AI 서밋(Summit) 행사를 통해 HBM3E 16단을 공개했고, 고객사 출시 일정에 따라 16단 제품이 양산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내년 연간 주력 제품은 12단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면서 "이는 경쟁사와의 기술 격차와 향후 16단 이상이 주류가 될 HBM4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라며 "엔비디아의 AI 그래픽처리장치(GPU) 출시 로드맵에 따라 HBM4가 탑재될 루빈 제품군은 내년 말부터 양산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1년마다 기술적으로 진화된 새로운 세대의 부품을 개발하고, 양산하는 것에 대해 메모리 제조사들의 부담감도 증가하고 있다"며 "2026년인 양산 시점이 지연될 가능성도 있다"고 부연했다.
향후 메모리 3사가 엔비디아 HBM 공급망에서 경쟁해도 생산능력, 대역폭, 발열량 등 여러 평가 항목에 따라 제조사 간 HBM의 가격 차이가 존재할 것으로 정 연구원은 짚었다.
그는 "과거 몇 번의 메모리 반도체 업사이클에서 과다 투자로 공급 과잉과 가격 하락의 경험을 가진 제조사들은 경쟁사 진입을 염두에 두고 생산능력 확장 속도를 조절하고 있어, (HBM) 가격 하락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이라며 "다만 엔비디아가 실적 발표에서 70% 중반 이상의 높은 매출총이익률을 유지·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인 만큼, 원가 절감을 위한 HBM 가격 하방 압력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 지원법(칩스법) 폐기 가능성은 내년에도 반도체 업황 개선을 더디게 만드는 불확실성을 자리할 것이란 분석이다. 정 연구원은 "현재 바이든 정부는 트럼프 취임(다음달 20일) 전 칩스법 보조금 규모를 확정하기 위해 서두르고 있는데, 트럼프 행정부의 변동성을 염두에 두고 보조금 규모를 문서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며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칩스법의 전면 폐지보다 여러 지원들을 국가·기업 간 협상 카드로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자국 우선주의에 따라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미국 내 투자 유치 규모를 확대하기 위한 압박은 강해질 것"이라며 "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보수적 CAPEX 계획 수립 기조에 반하는 시나리오로, 국내 기업들의 투자 부담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밸류체인(가치사슬)으로 묶인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업체들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對中) 반도체 규제 강도에 따라 실적 희비가 엇갈릴 것이란 예상이다.
정 연구원은 "대중 반도체 장비 제재 강도가 높아지더라도 연구·계측용 소부장에 대한 규제까진 예측되지 않는다"며 "중국에 대한 매출 노출도가 높으면서 연구·계측용 소부장 사업을 영위하는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실적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짚었다.
고정삼 한경닷컴 기자 js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