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정치권이 위기에 빠진 국내 반도체 업체를 살리기 위한 세제 지원을 대폭 확대하기로 결정하면서 내년도 통합투자세액공제 지출 규모가 사상 처음으로 5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파격 지원으로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반도체 낙수 효과를 통해 경기를 살리겠다는 방침이다. 특히 재정 지출을 크게 늘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는 반도체산업뿐 아니라 서민·중산층 대상 비과세 및 세액 감면 등 조세 지출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파격 ‘세제지원’
28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기획재정부가 지난 9월 국회에 제출한 내년도 조세지출예산 중 통합투자세액공제 지출 규모는 4조2883억원이다. 올해(1조7402억원) 대비 두 배 이상 늘어난다. 반도체를 비롯한 국가전략기술에 대해 시설투자비의 15~25%를 세액공제해 주는 ‘K칩스법’ 일몰 기한을 올해 말에서 2027년까지 3년 연장하기로 한 데 따른 것이다.
정부는 세법 개정안이 연말 국회를 통과하면 내년도 통합투자세액공제 지출 규모가 당초 예상을 훨씬 웃돌 것으로 보고 있다. 여야 협의 과정에서 반도체 기업에 한해 통합투자세액 공제율을 현행보다 5%포인트 상향하기로 합의한 데 이어 국가전략기술 투자세액공제 대상에 연구개발(R&D) 장비 등 R&D 시설투자도 포함하기로 해서다. 정부가 지난 27일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에서 발표한 ‘반도체 생태계 지원 방안’에도 이 같은 내용이 담겼다.
내년도 통합투자세액공제 지출 규모는 6조원에 육박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전자가 경기 용인 기흥캠퍼스에 건설 중인 차세대 R&D 단지 ‘NRD-K’에 20조원을 투자하기로 하는 등 대규모 R&D 시설투자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조세 지출 중 규모가 가장 큰 보험료 특별소득·세액공제(내년도 7조5095억원)에 버금갈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당초 기재부 안팎에선 반도체 파격 지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세수 결손뿐 아니라 ‘부자 감세’ 논란을 키울 수 있는 점도 의식했다. 하지만 국내 핵심 산업인 반도체가 위기를 맞으면 국가 경제가 뿌리째 흔들릴 것이란 판단에 따라 모처럼 여야 정치권과 정부가 전격적으로 한목소리를 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재정 대신 조세 지출 확대하나정부는 반도체 등 주력 산업뿐 아니라 서민·중산층을 대상으로도 적극적인 조세 지출 확대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이날 KBS1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재정의 지속가능성은 유지하겠지만, 내수와 민생을 위해 재정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대외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재정이 더 확실하게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최 부총리의 설명이다.
통상 확정된 예산 지출 대비 규모를 늘리려면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야 한다. 정부는 경기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내년 추경 편성도 충분히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다만 추경을 편성하려면 적자국채 발행이 불가피해 국가신용등급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 지출 대신 비과세·감면 확대 등 조세 지출을 확대하는 방안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 통합투자세액공제
투자금액의 일정 비율을 소득세·법인세에서 공제받을 수 있는 제도로, 기업의 투자 확대를 유도하기 위해 2021년 신설됐다. 일반, 신성장·원천, 국가전략기술 및 대기업, 중견, 중소기업별로 차등 지원한다.
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