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 칼럼] 상법 개정, 오해와 불편한 진실

입력 2024-11-26 17:31
수정 2024-11-27 00:33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까지 확대하는 상법개정을 둘러싼 갑론을박이 살벌하다. 경제 8단체, 16대 그룹이 총출동해 긴급성명을 냈다. 그러자 거대 야당이 ‘국정농단 세력은 끼지 마라’며 험악한 언설을 퍼부었다. 서슬 퍼런 ‘입틀막 정치’다.

‘이사는 주주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상법 조항을 둔 나라는 사실상 없다. 유기적 단일체로서의 주주집단이 존재하지 않는 데다 회사 이익과 주주 이익이 상이해서다. 이와 관련해 1990년 미국 워너브러더스와 타임의 인수합병이 기념비적 사건으로 꼽힌다.

당시 파라마운트가 주당 200달러의 인수가를 제안했지만 타임은 70달러를 제시한 워너브러더스를 합병 파트너로 선택했다. ‘주주에게 큰 손해를 끼친 딜’이라며 타임 이사회를 상대로 소송이 제기됐다. 법원은 이사들의 손을 들어줬다. 기업 문화가 비슷한 워너브러더스와의 합병이 장기 성장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존중한 결과였다.

‘인수합병의 경우에도 이사회는 주주가치의 단기 극대화 의무를 지지 않는다’고 적시한 당시 델라웨어 재판부의 인식은 이제 만국 공통이다. 판례에서 ‘주주 이익’이 가끔 언급되지만 ‘회사 이익 고려 시 주주 이익도 포함해 검토하라’는 보완적 의미에 그친다.

논의를 더 확장하면 ‘주주는 회사의 주인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만난다. 주주(株主)는 글자 그대로 주식의 주인일 뿐이다. 종잣돈을 주식으로 교환하고, 주식에 부여된 제한적 권리만 행사할 수 있는 이해관계자다. 주주로 참여한 목적도 단기 투자 이익 확보가 압도적이다. 회사 청산 시 채권자 빚 독촉에서 자유롭다는 점 역시 주주가 온전한 주인이 아니라는 강력한 반증이다.

이런 관점은 대주주에게도 적용된다. 다수 지분에 주어지는 권리를 넘어선 대주주의 절대자 행세는 그 자체로 위법적이다. ‘주주=회사 주인’이라는 말은 주식회사 제도를 유지하고 장려하기 위한 레토릭일 뿐, 법적 근거는 부실하다는 게 불편한 진실이다. “회사의 주인인 주주를 위해 일하는 게 당연하다”(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상법 개정론자들의 변이 공허한 이유다.

이론적으로 안 맞아도 대주주 약탈을 막으려면 어쩔 수 없다는 주장도 억지스럽다. 사실관계에 대한 오인이 적잖아서다. 대표 사례로 거론되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LG화학 배터리사업 물적분할을 보자. 대주주에 유리한 합병 비율이라며 낸 소액주주의 수차례 가처분은 법원에서 다 기각됐다. 올 2월 본안소송(1심) 재판부도 이재용 회장 등 14명 기소자 전원을 무죄로 판단했다. “삼성물산 주주들이 합병으로 오히려 이익을 봤다”며 약탈론을 일축했다. 주식매수청구 가격이 낮다거나, 국민연금의 부당 개입을 인정하는 판결이 있었지만 곁가지 쟁점이다.

LG화학이 알짜사업부를 물적분할한 게 대주주 횡포라는 비난도 과도하다. 분할 발표 당시 60만원대였던 LG화학은 잠시 주춤하다 넉 달 뒤 100만원을 뚫었다. 분할 발표 후 2년8개월간 고공에서 놀았다. 물적분할이 주가 악재가 아니었다는 논문(왕수봉·최재원)도 나와 있다. 배터리사업부로 있는 것보다 ‘물적분할 후 상장’이 소액주주에 더 이익이라는 게 저자들의 결론이다.

상법개정으로 행동주의의 공간이 커지면 밸류업될 것이란 생각도 단견이다. 행동주의의 개입은 중장기적으로 주가를 끌어내린다는 게 정설이다. 공격받은 기업의 5년 주가 상승률이 공격받지 않은 기업보다 9.7% 낮다는 게 펜실베이니아대 분석이다. 5년 뒤 R&D와 직원 수도 각각 9%와 7% 감소했다. 행동주의의 요구를 수용한 미국 기업 가치가 미수용 기업보다 16.1% 저평가됐다는 최근 조사(한국경제인협회)도 있다. 고용과 투자를 줄이고 배당을 늘린 게 펀더멘털 악화로 이어졌다.

일파만파 상법 파동은 불편하다고 진실을 외면하는 우리 내부 허약함의 단면이다. 개정 반대파를 재벌 앞잡이로 싸잡는 개미군단이야 그렇다 치자. ‘자유’를 앞세운 정권의 법률가 출신 실세 관료가 개정 작업의 주도자라니. 대법원마저 20개월 만에 반대에서 찬성으로 돌변했다. 한줌 찬성 법학자의 주류가 이른바 ‘SKY대’ 교수들이라는 점도 씁쓸하다. 오해는 돌파하고 불편한 진실은 용기 있게 직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