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제재'에도 러 경제 호황…데스노믹스의 역설

입력 2024-11-25 17:28
수정 2024-11-25 17:29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난 지 만 3년이 돼가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부터 강력한 대러 경제 제재를 가했다. 러시아의 돈줄을 죄어 우크라이나에서 물러나게 하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웬걸. 러시아 경제는 침체는커녕 과열을 걱정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옛 소련이 붕괴한 후 사상 최고 호황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어찌 된 일일까.
○2만 가지 제재에도 끄떡없는 경제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2022년 2월 이후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에 2만 가지에 달하는 경제 제재를 가했다. 이를 두고 ‘지옥 같은 제재’라고 했다. 하지만 3년 가까이 지난 현재 러시아 경제는 지옥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경제성장률은 전쟁 첫해인 2022년 -2.1%로 떨어졌을 뿐 작년 3.6%로 반등했고, 올해도 전년 동기 대비 1분기에 4.1%, 2분기 5.4%, 3분기에 3.1%의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달 러시아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3.6%로 전망했다. 석 달 전보다 0.4%포인트 높여 잡은 수치다. 전쟁 직전 8%대이던 실업률은 지난 9월 2.4%로 내려갔다. 옛 소련이 붕괴한 이후 최저치다. ○제재 우회하는 유령 선단지옥 같은 제재라고 했지만, 서방의 대러 경제 제재엔 구멍이 많이 뚫려 있었다. 국내총생산(GDP) 세계 2위 중국과 5위 인도가 제재에 전혀 동참하지 않았다. 주요 7개국(G7)과 EU 등 27개국은 2022년 12월부터 러시아산 원유 가격을 배럴당 60달러 이하로 제한했다. 이 기준을 지키지 않는 해운사에는 미국과 유럽의 보험 서비스를 받을 수 없도록 했다. 중국과 인도는 이런 조치를 오히려 반겼다. 이 덕분에 러시아산 우랄유를 다른 원유보다 싼값에 살 수 있었다. 이때부터 올해 9월까지 러시아가 수출한 원유의 47%를 중국이, 37%를 인도가 사 갔다.

정상적인 수출 경로가 막히자 러시아는 선적이 불분명하고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노후 선박을 이용해 석유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키이우경제대는 이 같은 ‘유령 선단(shadow fleet)’을 통한 수출이 러시아 석유 수출의 70%를 차지한다고 분석했다. ○러시아판 소득주도 성장러시아 경제를 떠받치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노동력 부족으로 인한 실질임금 상승이다. 전장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일할 사람이 부족해지면서 실업률이 하락하고 임금이 상승한 것이다. 러시아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러시아 근로자의 실질임금은 지난해보다 12.9% 올랐다. 또 러시아 정부는 전선에 투입되는 군인과 가족에게 아낌없이 돈을 풀고 있다. 작년 하반기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군인과 가족에게 지급한 급여와 보상금이 3조루블(약 42조원)에 이른다. 정부가 돈을 풀어 소득이 늘어나고 늘어난 소득만큼 소비가 증가하는 러시아판 소득주도 성장이다. 러시아 경제학자 블라디슬라프 이노젬체프는 이런 상황을 ‘데스노믹스’라고 명명했다. 젊은이들의 죽음을 대가로 한 호황이라는 의미다. ○오르는 물가, 쌓여가는 재정적자러시아 경제에 불안 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물가가 급등하고 있다. 지난해 5.9%로 비교적 안정됐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올 들어 점차 상승해 최근 9%에 이르렀다. 이에 러시아 중앙은행은 지난달 기준금리를 연 21%로 올렸다. 재정적자도 쌓여 가고 있다. 2022년 GDP 대비 2.1% 적자를 낸 데 이어 지난해 1.9%의 적자를 기록했고 올해도 2% 적자가 예상된다. 당장은 호황을 보이더라도 경제 제재가 길어지면 장기적인 성장 동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종결 수순에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서방의 예상을 깬 러시아 경제의 탄탄한 성장세가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느냐에 따라 전쟁의 결말도 달라질 것이다.

유승호 경제교육연구소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