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빅테크 기업들이 억대 연봉과 파격적인 혜택 등 이른바 ‘레드머니’를 앞세워 미국 실리콘밸리의 인공지능(AI) 인재를 빨아들이고 있다. 우수 인재에게 필기시험 면제와 채용 절차 간소화 등 ‘패스트트랙’을 제공하는 등 중국이 글로벌 ‘AI 인재 블랙홀’로 떠올랐다는 분석이다.
25일 파이낸셜타임스(FT),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 해외 언론은 알리바바, 바이트댄스, 바이두 등 중국 최대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실리콘밸리에 AI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우수 인재 확보를 위한 대대적인 채용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FT는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 IT 기업들이 지난 수개월간 실리콘밸리에서 급격히 업무 기반을 확장했다고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 세계 최대 숏폼 콘텐츠 플랫폼 틱톡 운영사인 바이트댄스, 중국 최대 검색엔진 업체 바이두는 미국 경쟁 업체 직원 영입에 사활을 걸었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내 서니베일에서 AI 팀 확장에 주력 중인 알리바바는 자사의 AI 기반 검색 엔진 아시오(Accio) 개발을 위해 오픈AI에서 근무한 엔지니어, AI 연구자들에게 이직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알리바바는 미국 채용 사이트 링크트인에 응용 과학자, 머신러닝 엔지니어, 제품 마케팅 관리자를 모집하는 광고를 올렸다. 오픈AI의 전직 연구원 한 명은 “중국 기업들로부터 취업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메일을 폭탄처럼 받았다”고 말했다.
AI 챗봇 ‘도우바오’의 대규모언어모델(LLM)을 연구하는 바이트댄스도 실리콘밸리의 AI 우수 연구자 채용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바이두는 실리콘밸리에서 AI 연구실을 운영하며 2017년부터 음성 인식 및 자율 주행 분야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를 다수 고용했다. FT는 “중국 빅테크 기업뿐 아니라 규모가 작은 중국 스타트업까지 미국에 진출해 실리콘밸리 엔지니어 채용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짚었다.
중국의 인재 싹쓸이 추세는 AI 전문 인력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베이징대와 중국 구직 컨설팅업체 즈리안자오핀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올 상반기 중국 기업의 자연어처리(NLP) 전문가 수요는 전년 동기 대비 111% 급증했다. 중국은 이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의 우수 AI 인재에게 필기시험 면제와 채용 절차 간소화 등 ‘패스트트랙’까지 제공하고 있다.
중국은 AI 인재 육성에도 적극적이다. 2018년부터 2000건이 넘는 대학 학부 과정에 AI 프로그램을 추가했다. 이 중 300건 이상이 최상위 대학이다. 240여 개 대학엔 AI 전공을 신설했다. 중국 AI ‘4대 천왕’ 스타트업으로 꼽히는 즈푸AI, 바이촨AI, 문샷AI, 미니맥스는 모두 칭화대 교수와 졸업생이 창업했다. 해외 유명 교수 영입에도 적극적이다. 2020년 중국 출신으로 미국 UCLA 교수로 재직 중이던 AI 석학 주쑹춘이 중국으로 귀국해 베이징범용AI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중국 정부는 지난 5월 AI 분야 ‘3개년 행동 계획’도 밝혔다. AI 기술 발전을 촉진하고 국제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생성형 AI 등 다양한 첨단 기술 분야의 표준을 강화하고 글로벌 인재를 보강한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AI 굴기’를 실현하겠다는 목표 아래 조직적으로 움직인 중국은 성과를 내고 있다. 지난 7월 중국과학기술정보연구소(ISTIC)가 베이징대와 함께 발표한 ‘2023 글로벌 AI 혁신 지수 보고’에 따르면 상급 학술지에 실린 AI 논문 점유율에서 중국은 36.7%로 미국(22.6%)을 앞섰다. 중국은 AI 논문 인용 수에서도 미국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특허 점유율에서도 중국은 34.7%, 미국은 32%를 기록했다. AI 규모의 경제에서도 중국은 상승세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이 발표한 ‘중국의 AI산업 동향 및 시사점’에 따르면 중국의 AI산업 규모는 2020년 1500억위안에서 연평균 26.8% 증가해 내년에는 4500억위안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일각에선 중국의 전략이 되레 시장 논리에 맞는다는 얘기도 나온다. 윤의준 서울대 재료공학부 특임교수는 “애국심에 호소해 인재를 묶어둘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며 “우수 인재 유출을 막을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