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노믹스 설계부터 잘못…금융완화로 물가도 성장률도 못 올려"

입력 2024-11-21 17:59
수정 2024-11-21 23:50

일본은행은 올해 3월 17년 만에 기준금리를 인상하며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폐기했다. 아베 신조 정부가 2013년부터 밀어붙인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에 마침표를 찍었다. 지난 7월 금리를 연 0~0.1%에서 연 0.25%로 인상한 데 이어 이르면 12월 추가 인상을 검토하고 있다. 시라카와 마사아키 전 일본은행 총재(75)는 “금리를 더 빨리 인상했어야 한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대규모 금융완화는 물가 상승이나 성장률 제고 등의 효과도 없었을뿐더러 일본 경제에 부작용만 키웠다는 지적이다. 애초 ‘디플레이션 탈출’을 목표로 삼고 금융완화를 정책 수단으로 삼은 ‘아베노믹스’는 설계부터 잘못됐다는 진단이다. 최근 도쿄 아오야마가쿠인대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일본은행이 17년 만에 금리를 인상했습니다.

“옳은 결정이었습니다. 높은 인플레이션율에도 불구하고 실질금리가 극히 낮았죠. 일본은 30년 가까이 실질적 제로 금리가 계속되면서 부작용이 매우 커졌습니다. 경제 신진대사가 떨어지고 재정 규율도 느슨해졌죠. 금리 인상이 더 빨랐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아베노믹스는 실패한 것인가요.

“아베노믹스는 실체가 거의 없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대규모 금융완화뿐이었죠. 금융완화는 효과가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일본 물가는 오르지 않았고, 성장률도 제자리에 그쳤습니다.”

▷최근엔 2%대 물가 상승률을 유지하고 있는데요.

“글로벌 인플레이션 영향이죠. 엔저와 일손 부족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디플레이션 탈출에는 성공한 것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원래 일본 경제가 직면한 문제는 디플레이션이 아니었습니다. 디플레이션 탈출이라는 과제 설정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됐습니다. 문제는 잠재성장률이 떨어지고, 생산성이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죠. 이는 물가가 오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2011년 기록적인 엔고에 일본 기업들은 비명을 질렀습니다.

“당시 한 전자업체 경영자가 찾아와 ‘우린 경쟁력이 있는데 엔화는 비싸고 원화는 싼 탓에 삼성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고 했죠. 그 후 엔화가 싸지고 원화가 비싸졌을 때도 그 기업의 경쟁력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기업의 경쟁력은 환율이 아니라 상품의 본질적 강함에서 나오기 때문이죠. 한국 기업이 강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엔저가 문제가 됐습니다.

“엔고 때문에 일본 기업이 해외로 진출하며 산업 공동화가 일어났다고 했는데, 이후 엔저일 때 더 많은 기업이 해외로 나갔습니다. 결국 엔저인데도 수출이 늘지 않았죠. 오히려 수입이 늘면서 무역적자에 빠졌습니다. 엔저가 일본 경제에 플러스라는 것은 명백히 현실과 어긋납니다.”

▷엔 캐리 트레이드가 또 발생할까요.

“8월 초 세계적인 규모로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이 있었죠. 당시 미국 고용통계 악화와 그 직전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이 맞물린 결과인데, 완전히 청산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직 엔 캐리 트레이드가 남아 있다는 의견도 있는데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일본 정치권은 여전히 금리 인상에 반대하는데요.

“언제나 그랬습니다. 다만 최근 달라진 점은 엔저로 가계의 실질 가처분소득이 줄고, 생활이 어렵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정치권도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죠. 중장기적으로 보면 구조적 엔저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대응이 필요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도 미 중앙은행을 흔들고 있습니다.

“정부나 정치권이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은 모든 국가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역사에서 배운 인류의 지혜죠. 다만 단순히 정부나 정치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중앙은행이 독립성을 갖고 통화정책을 실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국민이 지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중앙은행도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중앙은행은 스스로 투명성을 높여야 합니다. 국민에게 성실하게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죠. 국민이 믿어주지 않으면 중앙은행은 독립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일본이 잠재성장률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 번째가 노동력 확대, 두 번째가 생산성 향상입니다. 우선 고령자와 여성의 노동 참가율을 더 높여야 합니다. 외국인 근로자 유입과 출산율 제고도 필요하죠. 다만 금전적 지원뿐 아니라 여성이 아이를 키우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남성의 육아휴직을 확대하는 것이죠.”

▷생산성 제고 방안은 무엇인가요.

“핵심은 노동시장 환경을 바꾸는 것입니다. 일본은 여전히 대기업과 공기업을 중심으로 종신고용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고도 성장기에는 괜찮았지만, 지금처럼 환경이 급격히 변할 때는 노동력 재배분이 필수입니다.”

▷일본은 재정적자도 심각합니다.

“실효세율을 높이고 사회보장 지출을 억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본은 소비세가 10%지만 유럽에 비하면 낮습니다. 금융소득세는 부유층일수록 세 부담률이 낮아지는 구조여서 재분배가 필요합니다. 고령자가 모두 가난한 것은 아니라는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도쿄=김일규 특파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