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와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 처리를 전제로 경영판단의 원칙을 법률에 명시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이사에게 주주 충실의무를 부과하되 이에 따른 이사의 배임죄 노출 가능성을 낮춰주겠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상법 개정 관철을 위해 재계 우려를 일부 수용하는 모양새지만, 정작 재계는 “이사충실의무 확대와 경영판단의 원칙 명문화는 완전히 별개 사안”이라는 입장이다.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은 21일 통화에서 “대법원 판례로 널리 인용되는 경영판단의 원칙을 형법이나 상법 관련 조항에 추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진 의장은 “다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이사충실의무 확대 등을 담은 상법 개정에 여야가 합의한다면 이와 함께 경영판단의 원칙 도입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사충실의무 확대 합의가 경영판단의 원칙 법제화의 전제 조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경영판단의 원칙은 이사가 회사의 선량한 관리자(선관주의 의무)로서 합리적 근거에 따라 주어진 권한 내에서 의사결정을 내렸으면 회사가 손해를 봤더라도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다. 경영판단의 원칙은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 형사상 배임죄를 판단하는 데 적용돼 왔다. 우리나라는 2000년대 초반 사법부가 경영판단의 원칙을 처음 인정했고, 이후 대법원에서 이를 인정하는 취지의 판례가 여럿 나왔다. 하지만 대법원 판례가 기준일 뿐 법률에 명시돼 있지 않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돼 왔다.
민주당은 형법상 배임(355조)과 상법상 특별배임(622조) 관련 조항을 개정하는 방안 모두 테이블에 올려놓고 있다. 다만 기업 경영과 관련한 임원의 배임 행위만 규율하는 상법보다는 폭넓게 적용되는 형법을 개정하는 게 낫다는 분위기다. 민주당 법률위원장인 박균택 의원도 “배임죄는 워낙 많은 부작용이 있어 그동안 꾸준히 개선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고 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전날 일반투자자들과 만나 “기업인을 배임죄로 수사하고 처벌하는 문제를 공론화할 때가 됐다”고 했다.
이처럼 경영진의 배임죄 처벌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는 민주당의 주장은 여권이 먼저 제기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이사충실의무 확대와 형법상 배임죄 폐지를 패키지로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이 원장은 배임죄 완전 폐지가 어렵다면 상법상 특별배임죄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재계는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미국의 경우 경영판단의 원칙은 충실의무에 반하면 적용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민주당이 추진하는 상법 개정안은 주주에 대해서도 이사충실의무를 부여하는 만큼 경영판단의 원칙이 도입되더라도 배임 처벌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이다. 경제단체 관계자는 “경영판단의 원칙이 도입되더라도 이 원칙이 인정될지 말지를 놓고 결국 주주와 법정 다툼을 해야 한다”며 “소송 남발 우려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법적으로 충실 의무 대상에 주주를 일률적으로 포함하는 것은 찬성하지 않는다”며 “1·2·3대 주주 또는 소액 주주가 있는데, 이들은 이해관계가 굉장히 상충하는데 ‘(모든) 주주’를 충실의무 대상에 넣으면 많은 혼란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 경영판단의 원칙
이사가 회사의 선량한 관리자로서 합리적 근거에 따라 재량 범위 내에서 행한 경영 판단에 대해서는 회사에 손해가 발생해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도록 한 법률적 판단 기준.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 형사상 횡령·배임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한국에서도 대법원 판례로 폭넓게 인정돼 왔지만 법률상 명문 규정은 없다.
한재영 기자 jy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