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전쟁도 종전도 두려운 우크라 국민들

입력 2024-11-21 17:36
수정 2024-11-22 00:06
“정부는 계속 싸우겠다고 하지만 저는 그저 겨울이 조금 더 견디기 쉬웠으면 좋겠어요.”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거주하는 바실리나 네레드 씨(23)는 지난 19일 러시아 침공 1000일째를 맞아 한국경제신문과 한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그는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네레드 씨는 “러시아로부터 영토를 되찾을 가능성이 없다”며 “최근 많은 사람이 이런 생각에 동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1년 전만 해도 러시아와의 협상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우크라이나 내 분위기가 서서히 변하고 있다. 전쟁이 3년째로 접어들면서 피로감이 누적된 결과다. 키이우국제사회학연구소가 지난달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2%가 종전을 위해 일부 영토를 포기할 수 있다고 답했다. 1년 전 14%에서 두 배 이상으로 증가한 수치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의 폭격으로 긴급 정전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하루 5시간 정도만 전기가 안정적으로 공급되고 있다는 게 현지인들의 전언이다.

올가 클레피코바 씨(48)는 “지난여름 정전으로 에어컨 사용이 어려워져 섭씨 38~40도의 폭염 속에서 1주일간 근무했다”고 했다. 그는 “밤낮없이 창문 밖에서 폭발이 일어난다”며 “전쟁이 삶의 모든 영역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토로했다. 율리아 카비시 씨(30)는 “폭발로 인한 불빛 때문에 밤잠을 설칠 때가 많다”며 “공습이 있을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어 출근조차 힘들다”고 했다. 인터뷰에 응한 현지인들은 국제사회의 지원들이 일상의 고통을 덜어주기엔 역부족이라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이들 모두 전선에서 희생된 친구와 지인을 애도했다. 네레드 씨는 전쟁이 시작된 이후 사람들이 더 이상 생일 파티를 열지 않는다고 했다. 그 대신 생일날 군대를 위해 모금하는 것이 더 흔한 일이 됐다. 그는 “매일이 마지막처럼 느껴진다”며 “다음 공습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을 수 있다는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종전이 과연 평화를 보장할지에 대한 의구심도 적지 않았다. 카비시 씨는 “우크라이나에 불리한 조건으로 협상하게 되면 러시아는 또다시 공격해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세 번째 맞은 겨울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 전쟁이 어떤 식으로 끝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소중한 사람들과 생일을 축하할 수 있는 봄을 맞기 전까지 전쟁의 한파가 가혹하게 몰아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