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해피엔딩' 산산이 깨뜨려…외설과 코미디로 후벼판 현실 세계

입력 2024-11-20 17:21
수정 2024-11-20 17:25

2024년 제77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 ‘아노라’(사진)는 막상 국내 관객에게는 그다지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현재의 한국 사회가 다소 보수화된(정치와 종교적인 면에서) 탓일 수 있다.

‘아노라’는 전반 1시간이 특히, 아주 많이 야하다. 외설적이라는 일부 지적은 비교적 정당하다. 주인공 애니(그는 한사코 자신이 아노라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를 비롯해 극 중 여성들은 1시간 내내 조각 케이크만 한 T팬티만을 걸친 채 나온다. 이들은 이른바 랩댄서라 불리는 스트립걸들이다. 애니(마이키 매디슨 분)는 러시아 엄청난 거부의 아들 이반(마크 아이델슈테인 분)과 섹스바 VIP룸에서 만났고 성관계를 가진다.

애니가 이반을 만나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1주일에 1만5000달러라는 돈 때문이다. 이반 같은 돈 많은 젊은 애들에게는 미래 따위는 없다. 그저 여자를 데리고 실컷 노는 것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반과 애니가 충동적으로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해버렸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때부터 다른 궤도를 달린다.

러시아에 있는 이반의 부모는 아르메니아 출신 ‘똘마니’들인 토로스(카렌 카라굴리안 분)와 가닉(바체 토브마시얀 분)에게 이들의 결혼을 무효화하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이반은 줄행랑을 치고, 애니는 한 마디로 난리를 피운다. 영화는 그렇게 후반부 1시간 동안 코미디 열차를 타기 시작한다.

언뜻 보기에 영화 ‘아노라’는 로맨틱 코미디다. 그런데 무엇으로 칸은 이 영화에 열광했을까. 그건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멜로의 공식을 완전히 뒤집고, 비틀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에서는 돈 많은 남자가 거리의 여자와, 공화당 대통령과 진보적 환경운동가를 두고 2시간 가까이 서서히 그것을 좁히게 만든다. 그래서 엔딩은 결국 둘이 그 차이를 없애고 사랑에 골인한다. 이것은 일종의 마취제와 같은 것이다. 그런 사랑 이야기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아노라’의 아노라가 깨닫는 것은 자신의 처지가 결코 이 ‘물신주의’의 극치인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처음에 자신이 원한 것이기도 하다. 애니 같은 여자는 벽장에 넣어 놓고 언제든지 써먹을 수 있는 섹스 토이일 뿐이다. 자본주의에서 몸을 파는 것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돈의 문제일 뿐이다. 이반은 부모의 자가용 비행기 트랩을 올라가기 전에 애니, 아노라에게 말한다. “1주일 동안 고마웠어.”

영화 ‘아노라’는 할리우드가 파놓은 허울 좋은 덫에 빠지지 않는다. 처음의 ‘신분’ 차이를 끝까지 지속한다. 관객은 애니가 자신의 러시아 본명인 아노라로 불리는 것을 왜 그토록 싫어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감독인 션 베이커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애니가 아노라가 되지 않는 이상 그의 창녀 ‘짓’, 그 계급과 신분의 허울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영화 ‘아노라’는 그런 면에서, 아무리 전반부 1시간 동안 벌거벗은 섹스 신이 즐비하게 나온다 한들 상업영화나 포르노가 아니다.

이건 철저하게 비상업 독립영화이며 일정한 정치적 메타포를 지니고 있는 작가주의 예술영화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