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간학회와 유럽간학회, 아시아태평양간학회는 간 질환 분야 3대 학회로 불린다. 이들이 펴내는 학술지는 세계 간 치료 의사들에겐 ‘바이블’이다. 안상훈 세브란스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이들 3대 간 분야 학술지의 편집위원을 모두 지내는 ‘그랜드슬램’을 이뤄냈다. 학술지에 임상 성과를 소개하는 ‘선수’로 뛰는 것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쏟아지는 의학 논문의 중요도 등을 평가하는 ‘심사위원’으로도 활약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가 참여한 간 질환 신약 관련 다기관 임상 연구만 90건, 국제학술지 발표 논문은 540건에 이른다.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성과를 내는 동력을 물었다. 안 교수는 “더 많은 환자에게 보탬이 되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는 “의사는 질병을 넘어 환자를 보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고장 난 간 고치는 소화기내과 의사안 교수는 B형·C형 등 바이러스성 간염으로 죽음의 경계까지 경험한 중증 환자에게 새 삶을 선물하는 소화기내과 의사다. 간 질환이 악화해 의식장애나 경련, 혼수상태에 빠져 응급실로 실려온 환자를 끝까지 치료해 퇴원으로 이끄는 게 안 교수에겐 큰 보람이다. 평생 마신 술 탓에 간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얼굴이 노랗게 바뀌고 복수가 차는 등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던 60대 환자를 끝까지 치료해 90대까지 건강하게 살도록 도왔다. 그가 돌보는 간 질환자 중엔 가족마저 포기한 환자도 많다. 세브란스병원에서 진행한 첫 혈액형 불일치 간이식 수술에도 안 교수가 참여했다.
간은 몸 밖에서 인체로 들어온 각종 약물과 독성물질, 몸속에서 만들어진 호르몬과 노폐물 등을 해독하는 정화조다. 간에 염증이 생기는 간염은 간암의 씨앗으로 불린다. 방치하면 간 조직이 딱딱하게 굳어져 더 이상 재생하지 못하는 간경변으로 이어질 수 있다. 손상된 간 조직엔 간암이 생기기 쉽다.
간염은 크게 바이러스성과 비바이러스성으로 구분된다. 바이러스성 간염 원인 바이러스는 A형부터 E형까지 다섯 가지다. 국내에는 A형과 B형, C형 환자가 많다. A형 간염은 면역력이 떨어진 젊은 환자에게 급성으로 나타나는 사례가 많다. 오염된 음식이나 물 등으로 전파돼 ‘후진국병’으로도 불린다. B·C형 간염은 만성 환자가 위험하다. B형은 60%, C형은 20% 정도를 차지한다. 비바이러스성 간염은 알코올성 간염과 비알코올성 간염으로 나뉜다. 비알코올성 간염은 각종 만성질환과 연관돼 선진국 등을 중심으로 환자가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전공의 때부터 국제학술지 논문 발표안 교수가 의사를 꿈꾼 것은 초등학교 때다.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의식을 잃고 뇌 수술을 받았다. 당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잠 못 자고 바쁜 삶을 살던 전공의 4년 차 때 처음 쓴 논문이 미국간학회지에 실린 뒤 자연스럽게 전공은 간 질환이 됐다. 교수들도 해외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하는 일이 흔치 않던 2000년께다. 당시 성과에 대해 안 교수는 “그저 운이 좋았다”고 했다.
미국 브라운대에서 연수받던 2001~2003년 B형 간염 바이러스의 분자생물학적 구조 연구에 매진했다. 2008년 호주 연수 시절엔 간염 치료제 내성에 대한 다기관 연구 성과를 냈다. 이후 추가 연구를 통해 B형 간염 치료제의 보험 기준까지 바꿨다. 안 교수는 “2~3개 정도 약을 쓰던 환자에게 단일 약물만 써도 내성 면에서 문제가 없다는 결과를 얻어 진료 가이드라인이 바뀌었다”며 “해당 치료법이 표준치료가 되면서 얻은 경제적 효과만 247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글로벌 간염 신약이 개발될 때마다 안 교수는 임상 연구자(PI)로 활약했다. 그가 연구책임자를 맡은 것만 60여 개에 이른다. 세계 의학자들의 참고서로 불리는 ‘뉴잉글랜드저널오브메디슨(NEJM)’ ‘란셋’ 등의 논문을 검증하는 리뷰어로도 활동하고 있다. ○죽음 문턱까지 간 환자에게 새 삶 선물간염 치료 환경은 계속 바뀌고 있다. 바이러스성 간염은 상당 부분 극복된 질환으로 불린다. B형 감염은 1990년대부터 도입한 백신으로 예방할 수 있다. 10대 미만 유병률이 0.5%도 되지 않는다. C형 간염은 항바이러스제 기술이 발전하면서 완치 시대가 열렸다.
다만 국가 백신접종이 도입되기 전 B형 간염에 걸린 환자들이 나이 들어 만성 간경화 등으로 진행해 병원을 찾는 사례가 늘어나는 것은 문제다. B형 간염은 아직 치료제만으로 완치를 기대하긴 어렵다. C형 간염은 변이가 많아 백신을 개발하기 힘들다. 안 교수는 “바이러스성 간염 환자가 전반적으로 줄고 있지만 급격하게 감소하는 C형 간염에 비해 B형 간염 감소세는 완만하다”고 했다.
이런 치료 환경도 변화를 앞두고 있다. 내년부터 만 56세가 되는 1969년생을 시작으로 C형 간염 국가건강검진이 시작된다. 숨은 환자를 찾아 치료하면 생존율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안 교수는 내다봤다. 내년께엔 완치율을 20%까지 기대할 수 있는 B형 간염 신약도 나온다. 지금은 먹는 약으론 완치율이 0.5%에 불과하다. B형 간염 완치 시대가 본격화할 것으로 안 교수는 예상했다.
“젊은 의사 시절엔 질병은 무조건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사명감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나이 들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의사는 결국 환자가 행복해지는 치료를 하는 사람입니다. 질병이 아니라 사람을 치료해야 하는 이유죠. 환자가 한두 달 더 사는 것보다 의미 있게 삶을 마무리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의사는 그걸 도와야 합니다. 환자도 질환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해야 해요. 자신의 질병을 알고 어떻게 치료를 진행할지, 약물은 뭐가 있는지, 부작용은 무엇인지 등을 파악해야 합니다. 정부는 예방에 더 투자해야 하죠. 이런 노력이 모여야 간염 극복도 가능해질 겁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