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문제는 학벌이야!

입력 2024-11-13 17:44
수정 2024-11-14 00:08
한국 사회에서 학벌은 신분과 계층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 상위 명문대를 정점으로 한 경직된 대학 서열 체계는 현대판 계급제와도 같아 직업과 소득, 결혼과 사회생활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학벌주의의 뿌리는 조선시대 유교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사농공상의 계급구조에서 학문을 중시하고, 과거제를 통해 관직에 오르던 구조는 오늘날 명문대 졸업생들이 고시나 전문직에 진출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6·25전쟁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 과정에서 명문대 출신들이 국가 주요 직책을 차지하면서 학벌을 향한 열망은 한국인의 DNA에 깊숙이 뿌리내렸다. 뜨거운 교육열은 국가 경제발전의 동력이었으나 이제는 많은 한국병의 근원이 학벌주의로 귀결되고 있다.

소득 증가와 자녀 수 감소로 명문대 진학 열망은 더욱 커졌지만 한정된 입학 정원 때문에 입시 경쟁은 날로 치열해졌다. 학교는 교육 본연의 목적을 상실하고 전인교육은 고사하고 인성교육조차 불가능한 입시 준비기관으로 변질했다. 과도한 경쟁은 학생들의 정신건강을 위협해 청소년 우울증과 공황장애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 한국 청소년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고, 행복지수는 최저 수준이다.

사교육은 영유아기부터 시작해 가계 부담이 커지고 있다. 저출생으로 학령인구가 줄어들지만 명문대 진학 경쟁은 여전히 치열하다. n수생과 편입생 증가로 입시 준비 기간이 길어지고,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교육비는 가늠조차 어려운 지경이다. 지방대학의 위기는 심화하고, 의대 선호 현상과 맞물려 국가 인력 수급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교육 문제는 부동산 가격 상승, 결혼 기피, 저출생 문제와 얽혀 사회 전반에 병폐를 낳고 있다.

역대 정부는 입시 경쟁과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제시했지만 입시 경쟁은 더욱 과열되기만 했다. 잦은 입시제도 개편은 오히려 학생과 학부모의 불안감을 키우고, 사교육 시장만 확대하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학벌주의를 완화하지 않고서는 교육 정상화는 불가능하다.

미국과 영국에서도 명문대 출신의 사회적 성공 가능성은 높지만 이들 국가에서는 대학 입시가 한국만큼 사회문제로 부각되지 않는다. 이는 명문대 외에도 다양한 사회적 성공 경로가 존재하고, 대학 서열이 한국처럼 단선적으로 고착화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처럼 학벌주의가 만연하고, 대학들이 일직선으로 서열화돼 있으며, 20대에 결정된 학벌이 평생을 좌우하는 구조에선 입시제도가 어떻게 바뀌어도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 경제 규모, 국방력, 문화산업 등은 세계 10위권에 진입했지만 수준 높은 고등교육 수요를 따라잡을 만큼 명문대의 질적, 양적 성장을 이루는 데 실패했다. 인적 자원이 유일한 나라에서 고등교육은 세계 강국으로 도약할 만큼 제도와 인프라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전공 분야별로 세계적인 명문대학을 다수 육성해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해야 했다. 대학의 단일 서열 체계를 깨고, 더 많은 학생이 자신의 재능과 적성에 맞는 다양한 경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하지만 수십 년에 걸쳐 고착한 단선적인 서열 구조는 소수 명문대 출신만이 성공하는 불행한 사회, 대다수 청년에겐 좌절과 패배감을 안겨주는 소위 ‘헬조선’을 만들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교육 문제를 ‘킬러 문항’ 배제로 해결하거나 서울대 입학 불균형을 ‘지역 비례선발제’로 완화하자는 식의 지극히 단순하고 안일한 발상만 나오는 현실이 답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