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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증시와 암호화폐 시장이 연일 뜨겁게 ‘트럼프 랠리’를 이어가고 있지만 한국 증시는 ‘나 홀로 약세’를 보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대선 승리가 가시화한 이후 지난 1주일 동안 코스피지수, 코스닥지수 수익률은 나란히 전 세계 최하위를 나타냈다. 한국 증시의 밸류에이션(실적 대비 주가)은 2018년 글로벌 금융위기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12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지난 5~12일 한국 코스피지수와 코스닥지수는 각각 4.11%, 5.78% 하락했다. 글로벌 주요국 증시 가운데 가장 큰 하락폭이다. 한국을 제외한 대부분 국가는 트럼프 당선 이후 불확실성 해소와 경기 부양 기대로 동반 강세를 보이고 있다.
블랙홀처럼 글로벌 투자자금을 흡수한 미국 나스닥지수는 이 기간 6.15% 급등했다. 일본 닛케이225지수와 대만 자취안지수도 각각 2.34%, 0.07% 상승했다. 심지어 미국과 무역 분쟁이 재발해 타격받을 것이라던 중국의 상하이종합지수도 3.38% 올랐다.
한국 증시가 글로벌 투자자의 외면을 받자 개인까지 잇따라 미국 증시와 암호화폐 시장으로 옮겨가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8일 서학개미의 미국 주식 보관액(1024억달러)은 지난달 말 대비 12.51% 급증했다. 같은 기간 비트코인 가격은 30% 넘게 급등했다. 트럼프가 암호화폐 시장에 친화적인 정책을 내놓을 것으로 예상되면서 비트코인 시가총액은 국내 주식시장 시가총액을 넘어섰다. 반면 국내 증시 고객 예탁금 규모는 50조원 밑으로 내려갔다.
투자자들은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추진할 ‘관세 폭탄 정책’이 수출 중심국인 한국 증시에 큰 악재로 작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와 2차전지, 자동차 등이 대표적인 피해 산업으로 꼽힌다. 트럼프의 승리 이후 나날이 높아지는 달러 가치도 국내 수출 기업엔 악재다. 이날 삼성전자는 2거래일 연속 52주 신저가를 다시 썼다. 코스피지수의 12개월 선행 주가수익비율(PER·8.53배)은 2018년 글로벌 금융위기(8.38배) 수준으로 급락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내 상장사들이 최근 내놓고 있는 3분기 실적도 부진하다. 이미 실적을 발표한 주요 기업 가운데 절반이 ‘어닝 쇼크’를 기록했다. 목대균 KCGI자산운용 대표는 “내수와 수출이 함께 둔화하는 국면에서 한국 증시는 내년 상반기까지 부진한 흐름을 보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최악의 저평가…K증시 '혹한기'
'떨어지는 칼날 된 한국증시…주도주·수급 실종 '속수무책'미국 대통령 선거라는 불확실성이 걷히자 세계 증시가 동반 상승하고 있지만 한국 증시는 나홀로 뒷걸음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한국 기업에 불리한 행정 조치를 내릴 것이란 불안감이 투자자들의 탈출을 부채질하고 있다. 트럼프 2.0 시대에 수혜가 예상되는 미국 증시와 암호화폐 시장으로 ‘투자 이민’이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국내 증시서 탈출 가속화12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MSCI 전세계지수는 미국 대선일이던 지난 5일부터 전날까지 2.3% 상승했다. 이 지수는 선진국 23개국과 신흥국 24개국의 주요 종목 주가를 합산해 산출한다. 같은 기간 코스피지수는 1.75% 하락했다.
글로벌 증시 대비 국내 증시 저평가도 최근 심화됐다. MSCI 전세계지수의 12개월 선행 주가수익비율(PER)은 6일 기준 18.18배로 2023년 말(16.45배)보다 높아졌다. 반면 코스피지수의 12개월 선행 PER은 작년 말 10.81배에서 최근 8.53배로 오히려 낮아졌다. PER이 하락한다는 것은 실적에 비해 주가가 저평가되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국내 투자자의 미국 주식 보관금액은 8일 기준 1024억6216만달러(약 143조7236억원)로 집계됐다. 미국 대선일 직전인 4일(909억1133만달러) 대비 12.7% 급증했다.
트럼프 당선인의 친(親)암호화폐 정책 영향으로 가상자산 시장에도 자금이 몰리고 있다. 암호화폐 시황 플랫폼 코인게코에 따르면 국내 5대 암호화폐거래소(업비트·빗썸·코인원·코빗·고팍스)의 이날 오후 4시 기준 24시간 내 거래대금 합산액은 197억6008만달러(약 27조7569억원)에 달했다. 지난주 9조원대에서 3배 이상 늘었다.
국내 증시는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8일 기준 국내 증시 투자자예탁금은 49조9022억원이었다. 지난달 23일 55조6771억원에서 약 3주 만에 5조원 넘는 예탁금이 줄었다. 국내주식형 펀드에서도 최근 1주일 사이 2920억원이 순유출됐다. 무역분쟁 재연 악몽에 실적 부진까지트럼프 2기 행정부가 공식 출범하면 한국 증시 약세가 심화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전문가가 많다. 트럼프 당선인은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반도체법(칩스법)을 폐지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대중국 반도체 수출 규제도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수출 규제 우려에 이날 원·달러 환율은 1403원50전까지 올랐다.
목대균 KCGI자산운용 대표는 “달러 강세가 이어지고 한국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이 약화하면 외국인 투자자들은 국내 증시에 매력을 느낄 요인이 없어진다”며 “국내 주력 산업인 반도체와 2차전지가 트럼프 정책의 영향을 많이 받는 업종이란 점도 한국 증시가 외면받는 이유”라고 했다.
올 3분기 국내 주요 기업 중 절반가량이 어닝쇼크(실적 충격)를 낸 것도 증시 하락 요인 중 하나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증권사 실적 추정치가 존재하는 기업 가운데 전날까지 올 3분기 실적을 발표한 기업은 198곳이다. 이 중 영업이익 컨센서스(추정치 평균)를 10% 이상 밑돌거나 기존 전망 대비 적자전환한 기업은 90곳으로 전체의 45.4%를 차지했다. 기존 영업이익 전망보다 10% 이상 웃돈 기업은 37곳으로 18.6%에 불과했다.
안정환 인터레이스자산운용 대표는 “만약 코스피지수가 2400선까지 내려간다면 반영 가능한 모든 악재가 반영된 셈”이라며 “한국 증시의 가격 매력이 부각돼 수급이 돌아온다면 상황이 호전될 것”이라고 말했다.
심성미/배태웅/이시은/류은혁 기자 smsh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