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근무했던 회사에서는 연말이 되면 직원들이 ‘자기성과 기술서’라는 것을 직접 작성합니다. 본인의 성과에 대해 철저히 자기 생각을 적는 겁니다. 양식은 딱 한 장입니다. 본인이 한 해 동안 잘한 일, 성과에 대해 표의 왼쪽에는 정량적인 것, 오른쪽엔 정성적인 것을 씁니다. 자산운용사의 펀드매니저라면, 왼쪽에는 운용 중인 주식형 펀드 수익률 '7% 아웃퍼폼(outperform·시장수익률 상회)', '펀드 수탁고 1000억원 증가'와 같은 항목들이 들어갑니다.
오른쪽에는 주식 세미나 참석, 기업 방문, 밸류에이션(실적대비 주가수준) 모델 연구 등을 적습니다. 본인이 개선할 점, 미흡한 점 같은 것은 쓸 필요가 없습니다. 안 써도 서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년도 목표나 해야 할 업무도 쓸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한 해의 본인 성과를 본인 주관대로 쓰면 됩니다. 그리고 맨 아래엔 희망 연봉과 희망 성과급을 적습니다.
이 자기성과 기술서를 보면 아주 재미난 현상이 나타납니다. 일에 대한 태도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 직원일수록 내용이 깁니다. 심지어 꼭 한 장으로 작성하라고 했는데 2장, 3장씩 적어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성과가 아닌 것을 자신의 것으로 둔갑시키기도 합니다. 앞서 말한 '립 서비스형'입니다. 그리고 희망 연봉은 현재 연봉이나 회사가 생각한 연봉과 큰 괴리를 보입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자신이 속한 부서가 성과를 거의 못 냈는데도 희망 성과급은 높게 쓴다는 겁니다.
자기성과 기술서를 보면서 해당 직원에 대해 미처 파악하지 못한 부분이 없는지를 살펴봅니다. 그리고 희망 연봉이나 성과급이 현실과 과도하게 차이가 나면 담당 임원은 면담을 통해 왜 그렇게 적었는지 확인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조직에서 연차가 쌓일수록 희망 연봉과 현실 연봉의 수준이 얼추 맞춰집니다. 회사가 미처 몰랐던 직원의 가치를 재평가해 연봉을 올리거나, 직원 스스로가 현실적 판단으로 희망 연봉을 조정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이루어지는 거지요.
그 괴리가 큰 직원은 머지않아 이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회사 입장에서 그 직원이 역량이 뛰어나다면 연봉을 인상하겠지만, 차이가 크다는 건 직원이 생각하는 본인의 가치만큼 회사는 평가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괴리가 클수록 불만도 커지고, 그게 쌓이면 이직으로 연결됩니다.
회사에서는 출퇴근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자리를 지키는 것이 일을 잘하는 게 아닙니다. 언젠가 방송에서 선거철 어느 정치인의 사무실을 소개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선거사무실 벽에 붙은 표어를 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표는 밖에 있다'. 정말 그렇습니다. 열심히 선거 운동하는 후보의 사무실엔 사람이 북적이지 않습니다. 모두 밖에서 뛰고 있기 때문이지요. 부진한 후보의 사무실에는 이상하게도 사람이 많습니다. 대부분 후보에게 립 서비스하는 사람들입니다. 표는 밖에 있는데 말입니다. 선거의 승패는 후보에게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표를 쥔 유권자를 설득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그때 느꼈습니다. 회사에서도 '고객은 밖에 있다'고.
금융회사는 제조업이 아닙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지 않죠. 고객의 자산을 잘 운용하고 관리해 주는 회사입니다. 그 운용과 관리에 필요한 시간에만 회사에 있으면 됩니다. 주식 시장이나 채권 시장이 열리는 시간에 집중해서 일하면 됩니다. 그날 트레이딩할 것이 없다면 굳이 자리를 지켜야 할 필요 없습니다. 기업탐방을 하거나 고객을 만나러 가면 됩니다. 제가 자산운용사에서 일할 때, 직원들에게 트레이딩 등 운용에 필요한 업무를 마친 이후엔 언제든 밖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한 이유입니다.
여의도에서는 누구를 만나든지 거의 일과 연결됩니다. 사람을 만나는 게 영업이자 성과를 내는 길입니다. 그 시간에 여의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 이들일까요? 기관 투자가 아니면 펀드 매니저, 애널리스트, 브로커 등 대부분 금융권 사람들입니다. 여의도에서 만나는 학교 선후배도, 친구들도 대부분 같은 업계 사람들입니다. 하는 일이 비슷하니 잡담해도 당연히 업계의 이야기입니다. '놀아도 도서관에서 놀아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놀 때 놀더라도 도서관에 있으면, 조금이라도 공부한다는 거지요. 여의도에서는 '놀아도 회사 밖에서 놀아라'란 말이 통하는 곳입니다.
여의도 길거리는 오후 3시30분이 지나면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주식 시장이 폐장한 시간입니다. 채권 시장 또한 장외 거래가 중심이지만, 오후 4시면 대부분의 거래가 마무리됩니다. 그러니 퇴근 시간인 6시까지 2시간 정도가 남는 셈입니다. 물론 지원 업무 등 백 오피스를 담당하는 부서는 그때부터 정말 바빠지지만, 운용하지 않는 마케팅 부서는 오전부터 언제든 외근할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 자산운용사에 왔을 때 대부분의 직원은 그 시간에 책을 읽거나 개인적인 볼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언했습니다. 자리에 있지 말고 나가라고. '고객은 밖에 있다'고. 책은 근무 시간이 아닌 개인 시간에도 볼 수 있습니다.
만년 적자에 자본 잠식인 회사에서 그 시간에 책을 보고 개인적인 잡무를 하면 어떻게 하나요? 회사 외부로 나가 기관의 아웃소싱 매니저와 커피도 마시고, 애널리스트를 만나 같이 기업 탐방도 가고, 어느 기업이 좋은지 투자 정보도 듣고, 브로커를 만나 어느 운용사에서 무슨 상품이 나왔는지도 묻고, 업계 펀드 매니저를 만나 요즘 어느 회사의 누가 운용을 잘하는지도 들으라고 했습니다. 하다못해 서점에 가서 요즘 어떤 책이 나오는지, 사람들이 어떤 책에 관심을 갖는지를 살펴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어쩔 줄 모르던 직원들이 하나둘씩 나가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사무실이 휑합니다. 펀드매니저나 브로커는 시장이 열리기 전 아침에 충분히 회의도 하고, 발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시장이 열리는 시간에는 시장에 집중해야 하고요. 하지만 시장이 마감되면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객은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이야말로 진짜로 성과를 올릴 수 있는 황금 시간입니다.
얼마 후 다시 공지했습니다. 고객과 만난 뒤 굳이 퇴근 시간인 오후 6시에 다시 사무실로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요. 바로 퇴근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난리가 났지요. 특히 나이 많은 임원들이 "그러면 근태 관리가 안 된다"며 걱정했습니다. 제가 답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성과를 내는 것이지 근태 관리가 아니다"라고요.
기업은 설립 목적에 맞게 성과를 내는 게 중요합니다. 인사팀에서도 걱정했습니다. "그 시간에 고객을 만나거나 기업 탐방, 마케팅 활동을 하지 않고 놀러 가거나 바로 퇴근하면 어떻게 하냐"며 저는 설득했습니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성과로 나타나게 돼 있습니다. 하루 이틀은 몰래 그럴 수 있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직원이라면 걱정이 돼 계속 그러지는 못할 것입니다. 저는 직원들에게 농담처럼 말했습니다. "그 시간에 놀아도 좋습니다. 저에게 들키지만 마세요"라고.
외부 활동이 많아지면서 아침 회의 시간에 양질의 정보가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시장에 어떤 신상품이 나왔는지, 어느 경쟁사에서 조직을 새롭게 만들고 있는지, 고객사들의 자금 상황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등 업계의 동향은 거의 실시간으로 모니터링됩니다. 전화나 메신저, 이메일로 할 수 없는 오프라인 정보까지 더해지면, 개인의 업무는 물론 각 부서의 전술적 목표, 회사의 전략적 방향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양하고도 중요한 채널이 만들어지는 셈입니다. 게다가 오프라인에서 고객과 자주 소통하면 온라인에서 들을 수 없는 고객들의 애로사항이나 니즈를 현장감 있게 파악해 영업 성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첫해, 모두의 노력으로 당시 우리 회사의 수탁고는 1조원이 늘었고, 만년 적자 회사에서 흑자로 전환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직원이 몇 년간 받아보지 못한 성과급도 받게 됐습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이윤학 전 BNK 자산운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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