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녹음하는 사회

입력 2024-11-03 17:30
수정 2024-11-04 00:08
녹취 파문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1992년 12월 ‘초원 복국’ 사건이다. 14대 대통령 선거 1주일 전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이 부산에 내려가 지역 주요 기관장들을 초원복국 식당에 불러 놓고 “우리가 남이가”라며 김영삼 민자당 후보의 당선을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기자고 모의한 사건이다. 정주영 국민당 후보 측에서 회동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식당에 도청 장치를 설치해 녹음한 내용을 터트려 메가톤급 파장을 몰고 왔다.

그러나 사태는 예기치 않게 흘러갔다. 기관장들의 불법 선거 개입이 아니라 도청이 더 문제가 되면서 전국의 영남표를 결집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도청에 가담한 관련자들이 모두 기소됐는데, 적용된 혐의는 주거침입죄였다. ‘몰래 녹음’에 대한 처벌조항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곤 이듬해 통신비밀보호법이 제정됐다.

통신비밀보호법에는 타인 간의 대화를 제3자가 녹음하는 경우에만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화 당사자는 상대 동의 없이 녹음해도 형사 처벌받지 않는다. 바로 이 조항이 ‘몰래 녹음’을 확산한 합법적 근거가 됐다. 여기에 스마트폰으로 간편하게 대화 내용을 녹음할 수 있게 되면서 상당수 사건에서 녹취가 ‘스모킹 건’ 역할을 하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이재명 위증교사 사건, 쌍방울 불법 대북 송금 사건, 김명수 전 대법원장 거짓 해명 사건 등에서도 녹취가 결정적 증거로 작용하거나 거론되고 있다.

‘몰래 녹음’은 곧바로 또 다른 ‘몰래 녹음’을 재생산할 정도로 만연해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명태균 씨 간 녹취 파문은 명씨가 윤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몰래 녹음한 것을 지인에게 들려줬다가 그 지인이 이를 다시 몰래 녹음한 것이 공개되면서 사건화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격이다.

대화·통화 중 녹음의 합법성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겁다. 사생활 침해와 불신 조장을 문제 삼는 시각에, 약자 보호를 위한 휘슬 블로어 역할이라는 긍정론도 만만치 않다. 구린 데가 있는 사람은 목욕탕에서 빨가벗고 얘기하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우리는 총만큼이나 무서운 ‘스마트 녹음기’를 품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