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의 공천 개입 의혹이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허풍쟁이 아니냐'던 명태균 씨와 윤 대통령이 직접 통화한 녹취 음성이 공개됐기 때문입니다. 더불어민주당이 공개한 두 사람의 통화 녹음엔 "공관위에서 나한테 들고 왔길래 내가 '김영선이 경선 때도 열심히 뛰었으니까 그건 김영선이 좀 해줘라' 그랬는데 말이 많네 당에서"라고 말하는 윤 대통령의 음성이 담겼습니다.
또 다른 녹취에서는 김 여사가 주인공으로 격상합니다. 명 씨는 윤 대통령과 통화 내용을 지인에게 들려주며 "지 마누라가 옆에서 '오빠 명 선생 처리 안 했어? 명 선생 이렇게 아침에 놀라서 전화 오게끔 만든 게 오빠 대통령으로 자격 있는 거야?'(라고 하니까) 나는 했다고 마누라한테 얘기하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대통령실에서 즉각 해명이 나왔지만, 여권에서도 납득하기 힘들다는 반응이 나옵니다. 통화 당시 당선인 신분이었던 윤 대통령은 공천 관련 보고를 받은 적도 없고 공천을 지시한 적도 없으며, 명 씨가 김영선 후보 공천을 계속 이야기하니까 그저 좋게 이야기한 것뿐이라는 게 대통령실의 설명이었습니다.
야권은 물론 여권에서 비판적인 반응이 나왔습니다. 당내 소장파인 김재섭 국민의힘 의원은 1일 SBS 라디오에 나와 대통령실 해명에 대해 "그걸 누가 믿느냐"며 "누가 뭐래도 대통령의 육성으로 들리는 그 소리 안에 공천과 관련된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굉장히 부끄럽고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영부인 관련 논란이 반복되는 사이, 윤 대통령의 직무 수행 평가 긍정률은 10%대로 떨어졌습니다. 한국갤럽이 지난달 29~31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5명에게 물은 결과, 국정 지지율은 19%로 집계됐습니다. 부정률은 72%로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그나마 윤 대통령과 명 씨의 통화 녹음 파일 관련 여론은 조사 기간 사흘 중 마지막 날에만 반영된 결과입니다.민주당, 尹 대통령 최악 상황에도 '탄핵' 언급 자제하는 이유
묘한 일은 더불어민주당이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탄핵'만은 입에 올리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녹취가 공개된 뒤 '대통령 탄핵에 대한 여론이 앞으로 생겨날 것이라고 보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기자님이 생각해보시라"며 즉답을 피했습니다. 박찬대 원내대표 역시 '녹취 내용이 탄핵 사유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국민이 판단하실 문제"라고 말을 아꼈습니다.
민주당이 대통령 탄핵을 주도하는 듯한 모습이 연출될 경우, 역풍이 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지지율이 20%도 안 되는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대통령 탄핵' 그 자체에 부정적인 민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노종면 원내대변인은 이와 관련해 "탄핵을 입에 올리는 순간 프레임이 걸리는 것"이라며 "우리 당의 책임 있는 당직자로부터 탄핵 얘기를 듣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대신 민주당은 일단 '연성 탄핵'에 나선 것으로 보입니다. 윤 대통령의 임기를 줄이거나 내각의 힘을 완전히 힘을 빼는 방식으로 사실상 탄핵과 같은 효과를 내자는 것입니다.
1일 일부 민주당·조국혁신당 의원 등 20명은 '개헌연대' 준비 모임을 출범했습니다. 2026년 지방선거 전에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제로 바꾸는 개헌안을 통과시킨 뒤 지방선거와 동시에 대선을 하자는 게 이들의 주장입니다. 현실화한다면 윤 대통령의 임기는 1년 줄어들게 됩니다.
이들은 "대통령 스스로 그만두는 것이 마땅하지만 윤 대통령은 그럴 의지가 없기 때문에 국민이 직접 해고 통지를 보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대통령 내외분은 이제 하산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고, 김두관 전 의원도 "스스로 임기를 단축하고 개헌을 통해 제7공화국의 문을 열라"며 임기 1년 단축을 촉구했습니다.
이후로도 일방적인 야당의 시간이 한동안은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2일부터는 장외 집회도 시작합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2일 국민행동의 날, 정의의 파란 물결로 서울역을 뒤덮어달라"며 "무너진 희망을 다시 세울 힘도, 새로운 길을 열어젖힐 힘도 행동하는 주권자에게 있다고 믿는다"고 썼습니다. 민주당은 아울러 14일에는 국회 본회의에서 김건희 특검법을 처리할 방침입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민주당이 탄핵을 향한 탄탄한 '빌드업' 과정을 밟고 있다"며 "특검과 탄핵 '투트랙'을 동시에 운영하면서도, 여론의 역풍을 피하기 위해 매우 전략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슬기 한경닷컴 기자 seulk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