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도 사고 팔 때 계약금을 받는데, 왜 회사 지분을 사고 파는 데 계약금을 안 받는 거야?"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한 은행장의 이 한마디가 한국 인수합병(M&A)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이후 한국 M&A 계약서에는 '계약금' 조항이 등장했고, 이는 글로벌 M&A 시장에서 찾아보기 힘든 한국만의 독특한 관행이 됐다.
"M&A는 불법" vs "기업 생존 전략"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생전 자서전에서 "남의 기업을 엿보며 인수하려 하지 말고 공장을 지어라"며 M&A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는 이런 인식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31일 법무법인 광장이 개최한 '제10회 광장 M&A 포럼'에서 김상곤 경영총괄 대표변호사는 "1994년 제가 입사했을 당시만 해도 M&A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다"며 "IMF를 계기로 한국 기업들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외국 기업들의 인수가 급증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M&A 시대가 열렸다"고 말했다.
당시 코스피 지수는 300포인트 이하로 폭락했고, 원달러 환율은 2000원을 넘어섰다. LG전자와 같은 우량기업도 회사채 발행 금리가 25%에 달했다. 김 대표는 "1997년부터 2001년까지는 거의 집에 가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한국식 M&A의 특징 '계약금'
"전 세계 어디에도 M&A 계약에 계약금을 넣는 나라는 없습니다." 김 대표의 말이다. 그러나 현재 국내 M&A의 51%가 계약금을 수수하고 있다. 계약금 규모는 매매대금의 10%가 가장 일반적이다.
구대훈 변호사는 "계약금 보호를 위한 담보조치도 한국의 특색"이라며 "계약이 무산될 경우를 대비해 62%가 담보조치를 취하며, 계좌질권 설정(59%)과 에스크로 계좌 설정(24%)이 주된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계약금 이자 귀속 문제다. 윤용준·박경균·강정해 변호사가 최근 3년간의 M&A 거래 트렌드를 분석한 결과를 분석 결과, 81%가 이자를 매도인에게 귀속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계약금을 매매대금의 일부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임을 보여준다.
'샌드배깅'에서 '클린엑시트'까지... 판례로 본 M&A 역사
한국 M&A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판례는 '현대오일뱅크-인천정유' 사건이다. 문호준 변호사(현 광장 PE팀장)는 "1999년 거래가 2018년까지 19년간 법정 다툼으로 이어진 이 사건은 '샌드배깅(Sandbagging)' 관련 법리를 확립했다"고 설명했다.
'샌드배깅'은 계약 위반 사실을 알고도 계약을 체결한 뒤 나중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행위를 말한다. 문 변호사는 "대법원은 계약서에 명시적 금지 조항이 없는 한 샌드배깅이 가능하다고 판시했다"며 "이후 계약서에는 '매수인의 인지 여부'를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조항이 등장했다"고 덧붙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발생한 한화그룹의 대우조선해양 인수 무산 사건도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김상곤 대표는 "4000억원 가까운 계약금을 둘러싸고 '위약벌이냐, 손해배상의 예정이냐'를 다퉜다"며 "대법원은 공평의 관점에서 일부 반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 판결 이후 계약서 작성 실무는 크게 바뀌었다. 구대훈 변호사는 "위약벌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는 진정한 위약벌이며, 추가 손해배상 청구도 가능하다'는 식의 구체적 문구가 등장했다"고 말했다.
PE의 등장과 새로운 변화
사모펀드(PE)의 등장은 M&A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렸다. 2004년 처음 국내에 도입된 PE는 현재 1100개가 넘는 펀드가 등록돼 있으며, 국내 GP 등록 수만 422개에 달한다.
강기욱 외국변호사는 "PE의 특성상 '클린엑시트'가 중요해지면서 2013년 진술보장보험(W&I) 도입을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최근 3년간 M&A 거래 분석 결과 대형 거래(1000억원 이상)의 15% 이상이 이 보험을 활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ESG와 컴플라이언스가 M&A의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강기욱 변호사는 "글로벌 PE들은 컴플라이언스 실사를 특히 중요시한다"며 "미국의 해외부패방지법(FCPA)이나 반부패 규제 준수, ESG 요구사항 등이 거래 구조와 조건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자본시장연구원 통계에 따르면 국내 M&A 건수는 2000년 102건에서 2023년 596건으로 6배 증가했다. 거래 규모는 13조원에서 123조원(2021년 기준)으로 10배 가까이 늘었다.
구대훈 변호사는 "최근에는 거래 규모 상위 20건 중 17건을 PE가 주도할 정도"라며 "정주영 회장님이 지금의 M&A 시장을 보신다면 깜짝 놀라실 것"이라고 말했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