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업이 아니라 밸류 파괴" 고려아연 발등 찍은 '폭탄 증자'

입력 2024-10-31 17:03
수정 2024-10-31 18:39
이 기사는 10월 31일 17:03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고려아연이 2조5000억원 규모의 일반공모 유상증자를 기습 발표하면서 자본시장도 발칵 뒤집어졌다. 지배구조 자문업계와 행동주의 업계는 이번 증자가 "밸류업이 아니라 밸류 파괴"라며 직격 발언들을 쏟아냈다.

31일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의 이남우 회장은 논평을 통해 "고려아연의 이번 신주발행 결의는 주주들에게 메가톤급 충격"이라며 "회사의 주인이 주주라고 생각한다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발상이고 주가 추락에서 보듯이 자본시장 교란 행위라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고려아연은 전날 기준가 대비 30% 할인된 가격으로 신주를 발행하겠다고 밝혀 하한가를 기록했다.

이 회장은 "재무이론에서 의사결정의 기본 원칙은 신규 주주나 매각하고 떠나는 주주가 아닌 기존주주의 이익 극대화"라며 "지금과는 정반대로 고가에 유상증자하고 저가에 자사주 매입을 했어야 했다"고도 지적했다. 이어 "고려아연만의 문제가 아니고 국제금융시장에서 한국 기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키울 것이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행동주의펀드들도 이번 사례로 경영권 분쟁에 영향을 끼칠 수 있어 술렁이는 분위기다. 한 관계자는 "최 회장은 분명 주주가치 향상을 위해 자사주 공개매수를 추진한다고 했지만 주주 환원을 위해 자사주 취득 후 소각한다고 해놓고 이젠 다른 주주 자금으로 차입금을 갚겠다는 건 명백한 자가당착"이라며 "이런 식으로 주주가치를 훼손하면서 경영권을 방어하는 방식이 허용된다면 앞으로 건강하고 건전한 방식의 경영권 분쟁마저 불가능해질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유증 계획을 결의한 이사회 이사에 대한 비판들도 쏟아졌다. 지배구조 자문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나서서 밸류업을 노력하고 있는데 정부 기조에 제대로 역행하고 있다"면서 "이같은 결정을 내린 고려아연 이사회 이사들에게 선관주의 위반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MBK파트너스와 영풍 연합이 법적으로 하자가 많은 유증이라며 즉각 반발에 나선 가운데 고려아연 측은 적법한 절차라며 이를 부인하고 있다. 주권 상장법인이 일반공모 방식으로 신주를 발행하는 경우 경영권 방어 등 '경영상 목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다. 2009년 증권거래법이 자본시장법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이 부분이 삭제된 바 있다.

절차 자체는 문제가 없더라도 자사주 공개매수를 진행하던 중 유상증자를 준비한 정황이 포착되면서 자본시장법 위반 소지가 크다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고려아연 유증 주관을 맡은 미래에셋증권은 자사주 공개매수가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 14일부터 실사 작업에 착수했다. 지난 11일 제출된 정정 공개매수신고서엔 이같은 내용이 예고돼있지 않았다. 자본시장법 전문 변호사들은 이 부분에서 자본시장법상 부정 거래 의혹이 제기될 여지가 크다고 보고 있다. 대규모 유증이 시장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고의로 누락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금융감독원도 이날 긴급 브리핑을 통해 자본시장법 위반 가능성을 살펴보겠다고 밝혀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함용일 금감원 부원장은 "공개매수 기간 중 유상증자를 동시 추진한 경위 등 구체적인 사실 관계를 살펴보고 부정한 수단 계획이나 위계를 사용하는 부정거래 등 위법행위가 확인되는 경우 고려아연뿐만 아니라 관련 증권사에 대해서도 엄중히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최윤범 회장이 일반공모 유상증자로 회심의 카드를 꺼냈지만 법적 리스크뿐만 아니라 여론전 측면에서도 악수를 던졌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최 회장 측 우군으로 분류됐던 기업들도 이번 유증을 계기로 변심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하지은 기자 hazz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