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정권 초기인 2017년 9월, 트럼프 집무실 프리패스 권한을 지닌 게리 콘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은 책상 위의 편지 한 장을 보고는 기겁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파기하겠다는 서한의 초안으로, 수신인은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콘은 구국의 심정으로 편지를 치웠다고 한다. 한·미 FTA 폐기는 한·미 관계 전체를 무너뜨리는 일로, 북한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시 7초(알래스카에선 15분) 만에 탐지할 수 있는 주한미군의 첩보 자산을 상실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의 주역 밥 우드워드가 쓴 <공포:백악관의 트럼프>로 알려진 얘기다. 만일 즉흥적 성향의 트럼프가 그 편지를 봤다면 서명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책 제목대로 진정한 힘은 ‘공포’에서 나온다고 여기는 트럼프에게 한·미 FTA 파기 통보는 한국과의 무역적자와 방위비 분담 문제에 극단적 압박 카드가 될 수 있어서다.
그 트럼프가 돌아올 조짐이다. 카멀라 해리스와 박빙의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핵심 경합주의 우세로 선거인단 수에서 의외로 낙승할 것이란 전망이 많다. 삼성은 삼성글로벌리서치의 판세 분석을 토대로 이미 이달 초 그룹 전 임원들에게 트럼프 재집권을 가정한 대응 전략 마련을 주문했다고 한다.
그의 복귀는 북·중·러와 이스라엘 정도를 제외하곤 대부분 국가에 끔찍한 시나리오다. 그중에서도 단단히 ‘찍힌’ 독일과 한국의 긴장감은 남다르다. 트럼프는 퇴임 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독일 수입차 관세를 인상하지 못한 것과 한국에서 방위비 분담금 50억달러를 받아내지 못한 것을 가장 후회했다. 백악관에 다시 들어가 마무리하겠다고도 했다.
트럼프 재집권을 우려하는 것은 크게 네 가지 측면에서다. 반도체·전기차 보조금 폐지와 관세 인상 등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이 그 하나다. 더 두려운 것은 방위비 분담금, 주한미군 감축, 김정은과의 정상 회담 문제 같은 안보 이슈다. 모두 트럼프 1기 때 ‘간을 봤던’ 사안들로, 2기 때는 작심하고 덤벼들 수 있다.
미국 대통령, 그것도 트럼프처럼 냉혹하고 자기중심적인 초강대국 리더를 이겨내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시쳇말로 비위를 맞춰주면서 실리를 챙기는 현실주의적 접근 외에는 별 대안이 없어 보인다. 첫 시험대는 방위비 분담금이 될 것이다. 여기에는 합리적인 비용 부담 셈법보다는 ‘정서 감안법’이라는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트럼프는 연간 수백억달러의 대한(對韓) 무역 적자를 보는 미국이 더 많은 비용을 분담한다는 것에 격분하는 사람이다. 그에게 한국은 ‘얌체’이자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비겁자’로 비친다.
가장 신경 쓰이는 대목은 김정은과의 협상이다. 트럼프의 안보보좌관 존 볼턴에 따르면 베트남 하노이에서 김정은이 고철이나 다름없는 영변 외에 나머지 네 개 북핵 시설 중 하나만 더 폐쇄한다고 했더라면 김정은이 원하는 것을 다 내줬을 판이었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노벨상 유혹에 넘어가 김정은과 돌이킬 수 없는 담판을 짓는 일은 막아야 한다. 방위비 재조정으로 첫인상을 잘 만들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트럼프 집권이 긍정적인 대목도 없지 않다. 트럼프는 그 어떤 미국 대통령보다 한국의 핵무장에 우호적이다. 우리가 파고들 부분도 바로 여기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핵 위력은 여실히 재입증됐다. 북한이 미국 눈치 보지 않고 파병할 수 있었던 것은 핵 자신감에서다. 우크라이나가 옛 소련 시절 핵탄두를 전부 폐기하지 않고 다만 몇 개라도 보유했더라면 우크라이나전은 애당초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다.
최선책은 독자 핵무장이다. 어렵다면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핵무기 제조가 가능한 일본처럼 핵연료 재처리 체계를 갖춰야 한다. 그마저도 힘들다면 전술핵의 재반입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과거 600~700기에 달했던 남한의 전술핵은 북한의 핵개발 저지를 위한 명분이라며 아버지 부시 행정부 때 완전히 없앴다. 참으로 어리석은 처사다.
트럼프 2기는 안보 의존증을 확 바꾸는 전기가 돼야 한다. 주한미군에 그리 연연하면서 정작 자기네 병력 복무 기간은 단축하는 한국을 미국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앞으로 대선, 총선의 주요 이슈도 우리의 핵자산 확보가 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핵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갈수록 국제사회도 부담을 가질 것이다. 국민 70%가 핵무장을 원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남한에서도 핵이 상수가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