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목 팀장은 2010년 대한제강에 입사했다. 이후 줄곧 공급망 관리 업무만 담당했다. 사무직이었다. 하지만 그는 현장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화상과 골절 찰과상 소식을 들으며 안타까워했다. 산업재해 위험을 안고 자식을 위해, 가족을 위해 매일 일터로 나오는 직원들을 볼 때마다 그는 생각했다. “왜 우리 현장의 동료들은 끊임없이 다쳐야 할까.”
어느 날 공급망을 담당하는 그의 눈에 작업복이 들어왔다. 작업복, 현장 직원들이 평상복보다 더 많이 입는 옷이었다. 산재 현장에는 항상 작업복이 있었다. ‘동료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현장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라는 그의 고민은 2021년 빛을 보게 됐다. 사내벤처 육성 프로그램에 ‘안전한 작업복’을 주제로 참여했다.
그 결과는 ‘아커드’라는 브랜드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가 이끄는 팀 이름도 개인보호장비(PPE, Personal Protective Equipment)팀이다. 한 직원의 동료에 대한 애정이 제강업체에서 탄생한 최초의 의류 브랜드가 된 것이다. 1954년 부산 국제시장 철물노점상으로 시작해 70년째 철근을 만드는 회사가 의류사업에 진출한 계기가 됐다.
아커드는 올해 글로벌 패션 트렌드이기도 한 ‘워크웨어’만 전문으로 한다. 워크웨어(Work Wear)는 단어 그대로 ‘일할 때 입는 옷’으로, 쉽게 말해 현장 작업복이다. 실제 아커드에서 만든 모든 제품은 대한제강의 작업복으로 사용되고 있다. 을지로 쇼룸에서 박 팀장을 만났다.
◆ 1600도 쇳물 앞에서 면티라니?박 팀장은 14년째 철강 관련 공급망을 관리해온 ‘철강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는 “제철소는 굉장히 뜨겁고 위험한 곳”이라며 “먼지도 많고 힘든 현장이다. 이쪽에서 일하는 분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어떻게 하면 다치지 않고 일할 수 있는지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게 아커드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제철소는 재해 사고가 많은 곳이다. 고용노동부 산하 안전보건공단(KOSHA)에 따르면 올 상반기 철강업계 산업재해를 입은 피해자만 7800명에 이른다. 연간 기준으로 따지면 1만 명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1600도 이상의 고온의 쇳물을 이용해 철근을 만드는 만큼 뜨거운 쇳물이 옷을 뚫고 피부에 닿으면서 화상 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한다.
제철소 현장이 아무리 위험한들 목숨을 잃거나 다쳐야 그 공장이 돌아가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는 게 박 팀장의 생각이었다.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현장의 애로사항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회사의 몫이며 당장 바꿔야 할 부분은 ‘작업복’이라고 판단했다.
통상 현장에서 입는 작업복의 가격은 상하의를 합쳐 5만원 내외다. 재킷이 3만원, 바지가 2만원. 불구덩이 속에서 일해야 하는 모든 직원들이 5만원짜리 옷에 생명을 맡기고 있는 셈이다.
그는 “회사는 안전을 항상 강조한다”며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컨설팅까지 받는다. 그럼에도 매년 다치는 사람이 계속 발생한다면 우리가 무언가를 놓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고 옷이 눈에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작업복은 현장 직원들이 가장 가까이서 접하는 물품이다. 출근과 동시에 갈아입고 퇴근할 때까지 같은 옷을 입어야 한다. 일부 직원들은 집에서 입고 나오기도 하고 퇴근 후 개인 업무를 볼 때 입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업복은 직원들이 현장의 변화를 즉각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박 팀장이 지적하기 전까지 모두가 면으로 제작된 작업복을 입었다. 철강업체의 일반적 관행이다. 면 섬유는 화재에 가장 취약한 소재로 꼽힌다. 난연 성능이 하나도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회사에서 지급하는 필수품으로, 직원들은 근무 시 면 소재의 작업복을 반드시 입어야 했다. 안전을 보장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시장에 나오는 작업복이 대부분 면 소재였기 때문이다.
박 팀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그는 “우리도 트레이닝복을 입을 때와 잘 차려진 슈트를 입을 때 행동이 다르다. 좋은 품질의 옷을 입는다면 근무지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현장에 대한 인식도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좋은 작업복을 입는다면 직업에 대한 자존감을 높일 수 있고 현장 직원들의 불안전한 행동도 달라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회사의 대우가 달라진다면 직원들 역시 회사에 대한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확신했다. 회사와 직원이 서로 존중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기틀인 셈이다.
◆ 제철소 직원, 패션 산업에 뛰어들다다만 처음부터 제품을 제작할 생각은 없었다. 잘 만들어진 제품을 대량으로 사서 직원들에게 배분할 계획이었다. 돈만 내면 되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했다.
박 팀장의 계획이 틀어진 것은 시장조사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는 “좋은 작업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착각이었다. 작업복 시장은 ‘싼 제품을 대량으로 공급하는 곳’으로 획일화돼 ‘좋은 제품’이라는 게 없었다. 좋은 작업복을 구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싶었다”고 했다.
‘고품질’과 ‘작업복’이 한 문장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회사 입장에서 작업복은 연간 최소 2회 이상 지급해야 하는 소모품이다. 비용에 대한 우선순위를 정할 때 옷에 대한 지출은 제일 마지막까지 밀려나는 부분이다.
그는 “30년 전 우리 아버지 세대가 입고 다닌 작업복과 지금 우리가 입는 작업복의 질이 크게 다르지 않다”며 “회사 입장에서 작업복을 ‘가치’보다는 ‘가격’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전했다.
박 팀장은 옷을 디자인하기 전 현장 직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어떤 부분을 개선해줬으면 좋겠는지 어떤 기능을 담아야 하는지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공급자’가 아닌 ‘사용자 입장’에서 정말 필요한 제품을 만들어야겠다는 게 박 팀장이 옷을 만들기 시작하며 다짐한 부분이다.
그가 옷을 만들면서 초점을 맞춘 부분은 ‘인식의 개선’이다. 회사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 역시 ‘안전하게 일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져야 하는데, 그들조차 ‘주는 대로 입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 박 팀장은 “직원들이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공급자는 그 이상으로 하지 않는다. 눈높이가 거기에 맞춰진다. 그래서 더 진심으로 임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게 탄생한 게 워크웨어 브랜드 ‘아커드’다.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실제 입을 옷을 만드는 데 1년이 걸렸다. 2022년 말 대한제강 내부에서 ‘아커드’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아커드는 ‘아크(ARC 또는 ARK)’와 ‘크리드(CREED)’의 합성어로 안전에 대한 신념을 따르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회사도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아예 PPE 팀을 만들어 박 팀장의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당초 아커드는 대한제강 직원들이 입을 용도로 만들어졌으나 지난해부터는 본격적인 B2B 사업도 시작했다. 대한제강 작업복이 업계에서 입소문을 타자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박 팀장은 “입는 분들의 반응이 좋으니 금방 알려지더라”라며 “문의가 들어오면 현장에 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필요한 점을 찾아 작업복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아커드가 타협하지 않는 단 하나의 원칙은 ‘품질’이다. 최소한의 마진만 가져가는 것도 품질을 지키기 위한 전략이다. 박 팀장은 “가격을 낮춰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면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며 “좋은 품질은 우리가 아커드를 시작한 이유다. 그걸 양보하면서 사업을 확장할 생각은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당장의 매출이 아니라 작업복에 대한 인식 개선”이라고 강조했다.
박 팀장이 자부할 수 있는 부분도 품질이다. 그는 “작업복을 바꾼 뒤로는 단 한 건의 화상 사고도 없었다”며 “100% 작업복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작은 변화가 큰 변화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아커드를 통해 제조업에 대한 인식이 더 개선될 수 있도록 앞장서고 싶다”고 말했다.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