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상품을 중도해지 없이 다른 금융사로 옮길 수 있는 현물이전 제도가 31일부터 시행됩니다. 400조원 규모의 퇴직연금 시장을 둘러싼 금융사 간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란 관측이 나옵니다. 대형 증권사들이 다양한 투자 상품을 갖추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반면 중소형 증권사들은 소극적 행보를 보여 눈길을 끕니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이날부터 퇴직연금 현물이전 제도가 본격 시행됩니다. 앞서 고용노동부·금융감독원·한국예탁결제원 등이 지난해 2월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해 관련 제도 마련에 나선 지 약 1년8개월 만입니다.
그동안 퇴직연금 가입자는 다른 금융사로 계좌를 갈아탈 때 운용 중인 투자 상품을 전부 매도해야 했습니다. 상품을 옮기는 것은 불가하고 현금만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정부가 소비자 선택권이 제약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물이전 제도를 도입한 것입니다. 가입자가 자유롭게 금융사를 옮길 수 있게 되면서 퇴직연금 사업자들이 수익률 관리에 보다 신경 쓸 것이란 계산도 담겼습니다.
증권사들은 제도 시행에 발맞춰 다양한 투자 상품을 갖추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투자 선택지가 넓어져야 고객의 유입도 그만큼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한 증권사 임원은 "퇴직연금을 주로 원리금 보장형 상품으로 굴리고 있던 고객들의 계좌 이동 수요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며 "현재 가입한 예·적금 등은 그대로 두되, 매달 새로 들어오는 돈을 실적 배당형 상품에 투자하고 싶은 고객이 다양한 상품을 갖춘 금융사로 넘어가 새로 시작하려 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현재 미래에셋·한국투자·NH투자·삼성·KB 등 대형 증권사들은 그간 부족했던 퇴직연금 상품을 찾아 새로 등록하는 작업을 거의 마무리한 상태입니다. 현물이전 서비스가 본격 시작됨과 동시에 대부분의 투자 상품을 다른 금융사로부터 그대로 받아올 수 있도록 촘촘하게 구성한 것입니다.
반면 중소형 증권사들은 전혀 다른 분위기입니다. 상반기 말 자기자본 3조원 규모의 한 중형 증권사는 부족했던 퇴직연금 상품의 등록을 연말로 미뤘습니다. 제도 시행 후 시장 상황을 보고 대응하겠다는 입장으로 전해집니다. 이밖에 다른 중소형 증권사들도 무리해서 상품 라인업을 갖출 필요가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경우 다른 금융사에서 이들로 넘어오려는 고객 수요를 확보하기가 어려워지고, 고객의 이탈 가능성은 커집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적극적으로 라인업을 갖추려 하지 않는 건 투자 상품을 등록하는 데 들어가는 인력·시간 등의 비용이 예상되는 고객 유입으로 인한 수익보다 클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대형 증권사에 비해 퇴직연금 사업 관련 인력이 부족하고 자산관리 서비스 제공에 한계가 있는 만큼, 제도 시행 후 고객 유출에 무게를 둔 대응입니다. 업계에선 퇴직연금 현물이전 제도 시행 후 대형사와 중소형사 간 양극화만 더 심해질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중소형 증권사들은 현물이전 제도가 시행되면서 고객이 들어오는 것보다 나가기만 할 것으로 보고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제도 시행 이후 문제점들을 살피고 가능한 한 최소한의 대응만 하면서 시장 상황을 지켜보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퇴직연금 조직 규모와 서비스 역량의 열위 등으로 고객의 이탈이 걱정되는 상황"이라며 "(중소형사들은 대형사와 달리) 제도가 활성화될 것 같으면 그때 속도를 내도 늦지 않을 것이란 입장"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고정삼 한경닷컴 기자 js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