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너스 하이'에 중독된 사람들…산업 지형까지 바꾼다[러닝의 경제학③]

입력 2024-11-04 08:30
수정 2024-11-04 15:00
[커버스토리: 러닝의 경제학]

1960년대 스포츠화 시장은 독일 업체가 장악하고 있었다. 제왕은 아디다스였으며 푸마도 만만치 않은 브랜드였다. 일본의 아식스도 나름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나이키(당시 블루 리본 스포츠)는 아식스 제품을 수입해 파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랬던 나이키가 반전을 만들어낸 계기는 조깅의 확산이었다. 1970년대 미국에서 조깅 붐이 불자 나이키는 러닝화를 출시, 조깅 붐에 올라탔다. 아디다스는 머뭇거렸다. “조깅은 스포츠가 아니다”며 출시를 미뤘다. 1979년 선보인 최초의 쿠셔닝 운동화 ‘테일윈드’는 일반인은 물론 전문 운동선수까지 사로잡으며 본격적인 ‘나이키 시대’를 열었다.

1980년대에는 마이클 조던을 앞세운 마케팅으로 아디다스를 왕좌에서 끌어내리며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 위세는 최근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러닝화로 일어선 나이키가 러닝화로 인해 제왕이 자리를 위협받는 처지에 몰렸다. 전 세계적으로 메가 트렌드가 된 ‘러닝(달리기)’ 흐름에 혁신적인 제품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 자리는 호카, 온 등의 신흥 브랜드가 차지하고 있다. 국내는 물론 세계에 불고 있는 달리기 열풍은 산업의 흐름까지 바꾸고 있다. ◆커지는 시장‘러너스 하이’에 중독된 러너들이 늘어나면서 ‘달리기’는 거대한 스포츠산업으로 변화하고 있다. 러너스 하이는 미국 심리학자인 AJ 맨델이 1979년 발표한 논문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로 달리기 애호가들이 느낄 수 있는 도취감을 뜻한다. 모든 힘을 다해 달리다 일정한 고통의 순간을 넘어서면 마치 모르핀을 투여한 것과 같은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이는 마약처럼 달리기에 중독되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스포츠용품 업계에 따르면 국내 러너 규모는 500만~600만 명 수준으로 추산된다. 이 규모는 정기적으로 산행을 하는 등산 인구(1500만 명), 레저스포츠에 포함되는 낚시 인구(973만 명) 다음으로 많은 수치다. 코로나19를 타고 급속히 증가한 골프 인구(564만 명)와 맞먹는다.

이 같은 달리기 열풍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곳은 ‘패션 산업’이다.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국내 운동화 시장 규모는 2021년 2조7761억원에서 이듬해 3조1289억원으로 늘어났고 지난해 3조4150억원을 기록했다. 이 가운데 러닝화 비중은 30%인 1조원 이상으로 추산되며 업계에서는 러닝화 비중이 40% 이상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러닝화는 ‘없어서 못 사는 제품’이 됐다. 스위스 러닝화 브랜드 온(ON)이 대표적이다. 은퇴한 트라이애슬론 선수인 올리비에 베른하르트가 만든 온은 사용자의 움직임에 따라 밑창이 수평 또는 수직으로 압축돼 필요한 곳에 쿠션을 제공하는 제품으로 성공한 브랜드다. 온은 국내에 정식으로 수입·유통되지 않지만 스포츠용품 전문점들은 재고를 확보하기 위해 ‘직수입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온은 들어오는 즉시 팔리는 제품”이라며 “최근 문의가 가장 많이 들어오는 브랜드다. 재고가 적은데 그마저도 바로 품절된다”고 설명했다.

미국 운동화 브랜드 호카는 러닝화 전성기를 이끈 핵심 브랜드로 평가받는다. 나이키의 빈자리를 차지한 대표적인 러닝화로 20만~30만원대의 높은 가격에도 인기를 얻고 있다. 시중에 판매되는 러닝화보다 2배 이상의 쿠션감을 추가하고 험난한 지형에도 적합하도록 신발 밑창(아웃솔)을 과하게 부풀린 제품으로 러너들의 선택을 받았다.

미국 경제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나이키의 가장 큰 위협은 호카, 온 등과 같은 젊은 브랜드에서 촉발됐다”고 보도했다. 애널리스트에 따르면 신흥 브랜드들은 나이키를 위협하면서 시장점유율을 확대하고 있다.

러닝의 인기는 잊혀져 가던 일본 스포츠 브랜드 아식스까지 부활시켰다. 아식스 러닝화는 러너들 사이에서 ‘머스트 해브 아이템’(꼭 가져야 할 물건)으로 통한다. 높은 인기에 원하는 사이즈를 쉽게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올해 3월 출시된 파리 시리즈 러닝화는 구매가 시작된 직후 품절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콧대 높은 나이키도 한국 내 판매 전략을 변경했다. 일부 매장은 입구에 러닝화 존을 만들고 카테고리를 △로드 레이싱 △트레일 러닝 △로드 러닝 등으로 세분화했다. 바닥에는 운동장을 연상케 하는 트랙을 구현했다. 매장에서도 러닝을 하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다. 업계 관계자는 “나이키의 매장 구성만 봐도 러닝화가 얼마나 중요한 카테고리로 올라섰는지 알 수 있다”며 “러너들이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운동화인 만큼 브랜드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도 러닝 붐의 수혜를 보고 있다. 중국은 글로벌 신발 브랜드를 생산하는 주문자위탁생산(OEM)과 주문자개발생산(ODM) 업체들이 대거 몰려 있는 곳이다. 나이키, 아디다스, 리복, 뉴발란스 등 주요 글로벌 브랜드들은 중국에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중국 OEM 업체들은 유명 브랜드 제품을 제조하며 익힌 기술력을 앞세워 글로벌 러닝화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최근 러너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탄 중국 러닝화 브랜드 ‘원믹스’가 대표적이다. 실제 2019년 나이키는 원믹스를 상대로 디자인 특허와 상표 침해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원믹스는 ‘대륙의 실수’, ‘나이키 복제품’ 등으로 불린다. 5만원대의 저렴한 가격에도 글로벌 브랜드 수준의 쿠셔닝 기능이 내재돼있기 때문이다. 원믹스는 러닝화 리뷰 유튜버들 사이에서 ‘인기 리뷰템’(소개하는 제품)으로도 불리고 있다. 이외에도 중국의 361도 등의 초경량 러닝화도 국내에서 ‘가성비 제품’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 변화 2. 아웃도어까지 인기개념도 달라지고 있다. 평지나 정해진 코스를 뛰는 러닝뿐만 아니라 다양한 곳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특히 이색 경험을 선호하는 젊은 러너들이 늘어나면서 러닝과 아웃도어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비포장도로, 산길 등 험지를 뛰어다니는 ‘트레일 러닝’의 인기가 높아진 것도 개념의 변화다. 트레일 러닝은 지형 변화가 심한 산길을 뜻하는 ‘트레일(trail)’과 달리기를 의미하는 ‘러닝(running)’의 합성어다.

트레일 러닝은 아스팔트 위를 장시간 달리는 것보다 무릎에 가해지는 충격이 덜하다. 또 평지를 달릴 때 사용하지 않는 근육까지 사용해 상대적으로 운동 효과는 더 크다.

트레일 러닝의 인기는 아웃도어 업계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프랑스 아웃도어 브랜드 ‘살로몬’이 인기 있는 것도 트레일 러닝의 영향이다. 살로몬은 외관이 딱딱하고 쿠션감이 좋지 않다. 나뭇가지, 돌부리 등에 걸려 넘어져도 발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험지를 뛰어다니는 트레일 러닝에 맞춰진 제품이다. 캐나다의 프리미엄 아웃도어 브랜드 아크테릭스도 마찬가지다.

아크테릭스, 살로몬 등을 보유한 아머스포츠는 전 세계적인 인기에 힘입어 지난해 43억7000만 달러(약 6조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23% 증가한 수치다. 올해 2월에는 뉴욕증권거래소에 성공적으로 상장하며 13억7000만 달러(약 1조9000억원)의 자금을 조달했다.

아머스포츠는 기업의 성공이 아웃도어 브랜드의 영향이라고 설명했다. 아크테릭스는 지난 3월 전문 산악 선수를 대상으로 브랜드 최초의 신발 라인을 출시했으며 살로몬은 2026년 밀라노 동계올림픽의 공식 파트너로 선정됐다. ◆ 변화 3. 새로운 서비스의 등장러닝 인구가 늘어나면서 신규 업종이 뛰어들기도 했다. 새로 주목받는 것은 ‘런트립’ 여행 상품이다. 최근 들어 다양한 여행사에서 해외 마라톤대회 주최 측과 파트너십을 맺고 참가권을 확보해 러닝 전용 해외여행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올해 초 인터파크는 대만 에바항공과 함께 ‘마라톤홀릭’ 패키지를 출시했다. 대만 왕복 항공권, 숙소, 마라톤 참가 신청 등 모든 일정을 여행사에서 담당하는 상품이다. 또 육상 국가전문자격증을 보유한 선수 출신 코치진이 동행해 마라톤 코스를 분석하고 개인 역량에 맞는 효율적인 러닝 전략을 공유해주기도 한다.

하나투어는 소셜 러닝 플랫폼 ‘러너블’과 SIT(Special Interest Travel) 상품 공동 기획 파트너십을 맺고 세계 각국의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고 유명 코스를 달리는 상품을 지속적으로 출시할 계획이다. 앞서 하나투어는 러너블과 ‘사이판 마라톤 2024 5일’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외에도 노랑풍선, 클투 등도 관련 상품을 출시하고 있다. 러너를 신규 고객으로 유치하기 위해 마라톤 참가비 무료 지원 등 마케팅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달리기 기록을 관리해주는 앱도 다양해졌다. 그간 가장 인기가 많은 앱은 2014년 출시된 1세대 러닝 앱 ‘나이키 런 클럽(NRC)’이었다. NRC는 러닝 페이스, 위치, 거리, 고도, 심박수, 구간 기록을 세부적으로 기록하고 관리가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나이키 러닝 코치들이 적합한 러닝 가이드와 훈련 팁도 제공한다. 개인 최고 기록을 달성하거나, 목표 거리를 넘어서거나, 연속으로 달린 날이 늘어나면 앱에서 축하도 해준다.

이듬해 나온 것이 ‘런데이’다.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 등을 보유한 게임 공급사 한빛소프트에서 2015년 선보인 것으로 앱에서 제공하는 트레이너가 옆에서 함께 달려주면서 코칭해주는 게 서비스의 핵심이다.

최근 미국에서 NRC보다 인기를 얻는 것은 운동 추적 앱 ‘스트라바’다. 2009년 출시된 서비스로 자전거 기록에 초점을 맞춰 처음 나왔지만 현재는 러닝, 수영, 등산 등으로 영역을 확대해 대부분의 운동 기록 관리가 가능하다. 미국에서는 ‘운동앱의 애플’로 불릴 만큼 인지도가 높다. 스트라바의 전 세계 사용자는 9500만 명에 달한다.

러닝화만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편집숍도 등장했다. 나이키, 아디다스, 아식스, 호카 등 주요 러닝화 브랜드를 한데 모아두고 판매하는 점포다. 다양한 브랜드를 같은 공간에서 신어 보고 체험 가능해 쇼핑 편의성이 높다. 젊은 러너들 사이에서 편집숍이 인기를 끌면서 서울 곳곳에 생기고 있다. △성수동 굿러너컴퍼니 △통의동 온유어마크 △신사동 마브 서울 △문래동 그레이샵 등이 대표적이다. ◆ 변화 4. ‘러닝화’ 모시는 유통가최근 2030세대 젊은층을 중심으로 달리기 열풍이 이어지면서 유통업계도 러닝화 브랜드를 적극 확보하고 있다. 특히 백화점은 일반 매장, 팝업스토어 등 다양한 전략을 통해 젊은층을 끌어들일 방법으로 ‘러닝화’를 택하고 있다. 현대백화점의 스포츠 카테고리 매출은 전년 대비 9% 증가했는데 러닝 카테고리는 같은 기간 20% 급증했다.

매출의 60%가 2030세대 고객으로부터 발생하는 더현대 서울은 10월 22일 살로몬 매장을 신규 오픈했다. 2021년 오픈한 아크테릭스 바로 옆이다. 지하 2층에 있는 나이키와 아디다스, 4층 굿러너컴퍼니 등에 이어 러닝화 매장을 확대하고 있다.

더현대 서울에 입점된 굿러너 컴퍼니의 올해 매출은 전년 대비 42% 급증했다. 더현대 서울은 올해 러닝 관련 팝업스토어를 잇따라 열고 있다. 고어웨어(3월), 라이다(8월), 미즈노(9월) 등의 팝업을 열었고 11월에는 푸마 X 코페르니 팝업스토어를 운영할 예정이다. 현대백화점은 올해에 이어 내년 상반기에도 러닝화 관련 팝업스토어를 적극 운영할 계획이다.

신세계백화점은 나이키, 뉴발란스 등 매장을 잇따라 리뉴얼하고 러닝복과 러닝화 등을 다양하게 선보이고 있다. 하남점은 10월 1일 기존 나이키 매장을 ‘나이키 라이즈’ 매장으로 바꿨다. 리뉴얼한 매장은 기존 나이키 매장을 3.5배로 키운 530㎡(약 160평) 면적에 기존에 없었던 러닝과 트레이닝 카테고리 상품을 대폭 들여온 것이 특징이다. 광주신세계와 김해점에 각각 뉴발란스 초대형 규모 매장인 ‘메가샵’을 오픈한다. 기존 매장보다 3~3.5배 몸집을 키워 뉴발란스의 모든 카테고리를 체험할 수 있게 된다.

롯데백화점은 본점 ‘스포츠&레저관’을 리뉴얼 확장했다. 본관 7층과 연결된 에비뉴엘 6층 ‘나이키 라이즈’ 매장까지 포함하면 영업면적은 총 2770㎡(약 840평)에 달한다. 강북 상권 최대 규모와 인기 상품 물량 확보를 통해 국내는 물론 외국인 고객까지 흡수하겠다는 전략이다.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