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릭 피스커가 자신만의 전기차를 만들겠다며 피스커 오토모티브를 설립한 때는 2007년이다. 덴마크 출신으로 BMW, 포드, 애스턴마틴에서 디자인을 담당하다 테슬라로 옮겨 모델S의 초기 디자인을 맡았던 인물이다. 앞서 2005년엔 피스커 코치빌더를 세워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의 부유층을 대상으로 일종의 맞춤형 자동차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벤츠 SL55 AMG 기반의 피스커 트라몬토, BMW 645Ci 쿠페를 새롭게 변형한 피스커 라티고 CS 등이 대표적인 제품이다.
사업에 자신감을 얻은 피스커는 약 70억원의 투자를 받아 본격적인 자동차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2008년엔 최초의 제품인 피스커 카르마 콘셉트카(사진)를 북미국제오토쇼에 선보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카르마의 가장 큰 특징은 엔진의 역할 전환이다. 헨릭 피스커는 엔진을 구동용이 아닌 발전용으로 사용, 이른바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새로운 기술 육성 차원에서 피스커의 미국 내 생산을 전제로 돈을 빌려주기도 했다.
카르마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으로 확산됐다. 2011년 7월부터 본격 생산되자 영국의 TV 프로그램 탑기어에 소개되고 미국의 유명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1호차를 받기도 했다. 이후 피스커는 선셋, 서프 등의 추가 제품을 선보이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2011년 배터리 공급사였던 A123 시스템이 배터리 리콜을 시행했고 이듬해 두 번째 리콜이 이어졌다. 결국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A123 시스템이 파산하자 피스커 생산도 중단됐다. 당연히 후속 제품의 생산 또한 연기되자 자금난을 이기지 못하고 피스커자동차도 휘청거렸다. 흔들리던 헨릭 피스커는 2014년 피스커자동차에서 ‘피스커’ 브랜드만 남긴 채 모든 자산을 중국의 완샹그룹에 매각했다. 이후 완샹그룹은 피스커 브랜드를 버리고 카르마자동차로 사명을 변경했다.
실패에도 불구하고 헨릭은 ‘피스커’라는 브랜드로 재도전에 나섰다. 2016년 전기차 개발을 발표하며 피스커 이모션의 사양을 공개했다. 자율주행 기능은 물론 본격 전동화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2017년에는 스마트 시티, 공항 및 대학 캠퍼니 내에서 사용이 가능한 전시 셔틀 오르빗(Orbit) 개발 계획도 쏟아냈다. 헨릭의 움직임에 금융권도 관심을 보였고 피스커는 우회경로를 통해 증시 상장도 이뤄냈다. 비록 1차 도전은 실패했지만 자동차 업계 내에선 발상의 전환을 시도한 주인공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심도 많았다. 헨릭 피스커가 제품 개발은 잘하는데 대량 생산과 마케팅 측면에서 지나치게 낙관적인 상황만 부각시킨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인도 진출, 중국 공장 설립 등을 발표했지만 실현되지 못한 점도 비판의 꼬리표가 됐다. 그리고 우려는 현실이 됐고 지난해 손실액은 약 6400억원에 달했다. 적자를 견디지 못한 피스커는 다시 파산을 신청했고 최근 델라웨어 법원은 계획을 승인했다.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재고로 보유한 3000대를 매각하고, 남은 자산으로 채권자에게 부채를 상환하도록 했다.
피스커가 나락으로 떨어지자 최근 미국 내에선 피스커의 실패 원인을 집중 조명하는 보도가 쏟아지는 중이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로 품질과 소비자 만족을 외면한 채 오로지 비용 절감에 나섰다는 점을 꼽는다. 지나친 비용 절감 탓에 제품과 시장을 모두 놓친 결과로 연결됐다는 해석이다. 결국 소비자를 놓치면 제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시장 내 성공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인 셈이다.
권용주 국민대 자동차운송디자인 겸임교수